아하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냉철한불독44
냉철한불독4423.05.15

유럽의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에 대해 궁금합니다.

1500년대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이 일을 계기로 종교전쟁의 서막이 시작됐고 1600년대 들어서 어떤 사건 때문에 30년간 지속된 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알고있는데요. 그 사건이 무엇인가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5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30년전쟁(Thirty Years’ War)은 그 기간만큼이나 유럽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간단히 말해서 유럽인들이 겪게 된 최초의 세계대전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만큼 유럽 전역이 이 전쟁에 직·간접으로 참여했고, 그 결과 또한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30년전쟁은 1618년에 시작해 1648년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를 종교전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30년전쟁의 시작과 끝은 무엇일까?

    1618년 가톨릭교도인 보헤미아 왕 페르디난트(Ferdinand) 2세는 가톨릭 신앙만을 허용하는 조치를 내리려고 했다. 그러자 이를 수용할 리 없는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신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듬해인 1619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른 페르디난트 2세는 이후 이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이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알았을까?

    그 이전부터 독일 영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Christian) 4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신교도의 깃발을 높이 들고 가톨릭에 대항하는 대표로 스스로 나섰다. 이에 영국과 네덜란드는 그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는 독일로 진군했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4세가 패하면서 유럽의 강국 덴마크의 지위 또한 종말을 고했고, 둘 사이에는 뤼베크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폴란드와의 전쟁을 막 마친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가 신교도의 대타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그는 프랑스의 지원을 바탕으로 다시 독일을 침략했고, 신성로마제국의 명장 틸리를 전사시키는 성과와 함께 자신도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후 둘 사이에는 프라하 화의가 성립되어 다시 전쟁은 종지부를 찍는 듯했다.

    그러나 한 번 뺀 칼은 언젠가 그 빛을 발하는 법. 전쟁 시작 후 계속 배후에서 독일을 향하던 프랑스가 드디어 전면에 나선 것이다.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군과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고 스웨덴과 공동으로 전쟁에 임했다. 강국끼리 맞서자 전쟁은 일진일퇴를 거듭했고, 1637년 페르디난트 3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르자 오랜 전쟁으로 고통을 겪고 있던 국내 제후들의 압력에 못 이겨 1641년 종전을 제의했다. 그리고 1644년 처음 시작된 강화회의는 계속 시간만 보내다가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종결되었다.

    베스트팔렌조약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거의 전 유럽에 영향을 끼쳤다. 스웨덴은 발트 해를 장악하고, 프랑스는 알자스 지방에 대한 지배권과 라인 강 서쪽 지역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며,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독립 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반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배를 받던 독일 군주들은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들의 주권을 확립했다. 이로써 신성로마제국은 실질적으로 붕괴되었고, 독일은 수많은 공국들로 분리되었으며, 통일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오랜 기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30년전쟁의 배경이 독일인 까닭에 독일 전역은 황폐화하는 부산물까지 안게 되었다.

    그렇다면 30년전쟁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이전에 유럽의 종교는 가톨릭 하나였다. 교황은 황제 위에 군림했고 기독교 하면 가톨릭을 뜻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가톨릭이라는 말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 루터와 칼뱅은 종교의 보편성을 거부했고, 백성들은 새로 나타난 수많은 구원의 길 가운데 자신의 뜻에 따라 한 가지 길을 택하게 되었다. 가톨릭, 루터파, 칼뱅파, 세례파, 재세례파를 비롯한 수많은 예수의 후계자들이 자신의 길이 옳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30년전쟁의 원인이었고, 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은 자신의 길만을 옳다고 여기다가는 모두가 파멸에 이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30년전쟁은 종교적 관용을 용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 입장에서는 이것이 종교적 자유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각 군주들에게 주어진 종교적 자유를 그들은 타율적으로 수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30년전쟁 [Thirty Years’ War] (세상의 모든 지식, 2007. 6. 25., 김흥식)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 신성로마제국의 붕괴

    신성로마제국은 여러 국가들의 모임으로서 이들을 묶어준 원동력인 가톨릭이 붕괴하고 개신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생겨나면서 국가의 이념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2. 개신교를 통한 자유도시의 성장

    개신교를 통해 자유도시들이 어마어마한 자본으로 성장을 해내자 기술자들이 가톨릭을 버리고 개신교를 받아들이는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자유도시에서 개신교를 지지하면서 국가분열이 더욱 더 가속되었습니다.

    3. 유럽 국가들의 이득 계산

    전쟁결과

    1. 종교의 자유

    30년 전쟁 이후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개인의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게 되었습니다만 실질적으로 18세기까지 종교탄압은 존재했습니다.

    2. 프랑스와 스웨덴의 부상

    프랑스는 오랜 라이벌이었던 스페인의 몰락으로 유럽 강대국으로 부상했고 스웨덴은 발트 해를 장악했습니다.

    3. 국경의 변화

    4. 무기와 전쟁교리의 근대화

    5. 엄청난 인명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