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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찬하늘소177
힘찬하늘소17723.07.28

명나라 시기 정화의 대원정의 배경과 의의가 궁금합니다.

명나라 시기에 정화라는 인물을 필두로 대선단을 구성하여 동남아, 중동 아프리카 등지로 원정을 떠난것을 두고 정화의 대원정이라고 부른다고 알고있습니다.


이 당시 정화의 대원정이 있었던 배경과 의의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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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화가 원정을 나선 이유는 동남아시아 등지의 조공무역국을 늘리기 위한 것이라는 설과 당시 명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던 티무르에게 명나라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함이라는 설, 티무르 제국을 압박하기 위해 티무르 제국 서쪽에서 명나라와 협공할수있는 동맹국을 찾아 떠났다는 설, 정난의 변 이후 생사불명인 건문제를 찾아나섰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 대원정은 유럽의 대항해시대보다 70년 앞선 대원정이자 대항해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으며 그는 후세에 삼보태감이라 불리며 사마천 밀 채륜 등과 함께 환관의 영웅으로 이야기 됩니다. 정화가 머물렀던 각지의 항에도 정화에 대한 평찬은 높아 자바와 수마트라, 태국에서는 삼보묘가 건립되어 그에 대한 제사가 치러지기도 합니다.

    정화 함대는 당초부터 말라카 해협에 건국된 말라카 왕국을 인도양 항해를 위한 근거지로서 중시해 말라카 왕국을 우대, 그때문에 말라카 왕국은 정화 함대의 보호에서 성장해 중국 함대의 항해가 단절 된 뒤에도 동서교역의 중계항으로서 번영을 누리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명대의 항해가이며 환관(宦官). 원래의 성(姓)은 마(马)이며 이름은 화(和). 윈난 곤양(昆阳) 출신의 후이족(回族, 회족)인으로 조상은 원초(元初) 중앙아시아의 색목인(色目人) 귀족이었다. 증조부는 백안(伯顏, Bayan)으로 원(元)의 대덕(大德) 11년(1307) 중서평장(中书平章)에 임명되었고 부친은 마합지(马哈只, 원명 米里金)이 전양후(滇阳候)에 봉해졌다. 마(马)씨 성은 Mahmud의 한자식 표현이다. 부친 미리금(米里金)은 명 홍무(洪武) 4년(1371) 마삼보(马三宝, Mǎ Sānbǎo)를 낳았고 홍무 13년(1381) 겨울 명군이 윈난으로 진격 시 마삼보가 10세의 나이로 포로가 되어 거세가 된 후에 태감(太監)이 되어 연왕(燕王) 주체(朱棣)의 왕부(王府)로 들어갔다가 정난지변(靖難之变) 중 마삼보는 지금의 허베이 임구(任丘)인 허베이 정저우(郑州)에서 연왕(燕王) 주체(朱棣)를 위해 전공을 세웠다.


    영락 2년(1404) 명성조(明成祖) 영락제가 된 주체는 난징에서 마삼보에게 정씨(郑氏) 성을 하사하여 이름을 화(和)로 개명하며 관직이 사례감(司礼監) 다음의 4품(四品)에 해당하는 내관감태감(內官監太監)이 되었다. 선덕(宣德) 6년(1431) 정화는 삼보태감(三宝太监)이 되었고 선덕 8년(1433) 4월 사망하여 난징 우수산(牛首山)에 장사지냈다. 정화는 장형(长兄) 마문명(马文铭)의 장자 정문명(郑文铭) 양자로 삼아 대를 이어 지금의 마부가(马府街)인 난징 삼산가(三山街) 마부(马府)에서 거주하게 하였고 정화의 후예가 지금까지 21대가 이어지고 있다.

    1402년 영락제는 주변 국가들이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도록 사신을 사방으로 파견하였으며 영락 2년(1404) 정화를 수군 10만과 함께 일본 사신으로 파견하여 명과 외교관계를 맺게 하였으며 1405년 7월 11일 영락 3년 영락제는 240여 척의 배에 2만 7천 8백 명의 선원으로 구성된 함대를 조직하여 행해 할 것을 명하여 이후 30여 개 국의 서태평양과 인도양 국가와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다.


    정화는 매번 쑤저우 유가항(刘家港)에서 출발하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까지 7차에 걸쳐 원정을 떠났으며 선덕 8년 4월 돌아오는 길에 선상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명사(明史) 정화전(郑和传)의 기록에 따르면 정화의 항해보선(航海宝船)은 모두 63척으로 최대길이 44장(丈) 4척(尺), 넓이 18장(丈)으로 당시 세계 최대의 선박으로 현재의 척도로 길이 151.18m, 폭 61.6m의 4층 규모에 승무원이 24,800명으로 훗날 바스코 다 가마의 함대가 120톤급 3척, 승무원 170명이었고, 콜럼버스의 함대는 250톤급 3척, 승무원 88명에 비교하면 엄청난 규모의 대 함대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화의 사후 명은 쇄국정책으로 전환하였고 성화제(成化帝)때 다시 대항해 실시에 대한 주장이 대두되었으나 항해에 쓰이는 막대한 비용과 유교 관료들의 반대에 부딪쳐 물거품이 되었다. 정화의 항해에 대한 기록은 제4차 원정과 제7차 원정 때 동행했던 마환(马歡)의 영애승람(瀛涯勝覽)과 비신(費信)의 성차승람(星嵯勝覽), 공진(鞏珍)의 서양번국지(西洋番国志)등에 의한 견문지에 의해 전해져 그 시대 동남아시아에 대한 매우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으나 정화의 공식기록은 다시 대항해가 착수되는 것을 염려한 한 관료에 의해 감춰지고, 그 이후 기록은 행방불명되었다.


    정화의 대원정은 유럽의 대항해시대 보다 70년이나 앞선 대 원정이자 대항해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후세에 삼보태감으로 불리며, 사마천(司马迁), 채륜(蔡伦) 등과 함께 환관(宦官)의 영웅으로 회자되고 있으며 또한 정화가 머물렀던 각지의 항구에서도 정화에 대한 평판이 높아 자바, 수마트라, 타이에서는 삼보묘가 건립되어 그에 대한 제사가 치러지기도 하며, 믈라카해협에 건국된 믈라카왕국을 인도양 항해를 위한 근거지로써 중시하고 우대하여 믈라카왕국은 정화함대의 보호아래 성장하여 중국함대의 항해가 단절된 뒤에도 동서교역의 중계항으로써 번영을 누렸다

    출처 : 국가급 중국문화유산총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