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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세계인의 날이네요. 이 날은 왜 지정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계인의 날 이란?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 재한외국인과 국민이 함께 어울리며 소통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해졌습니다. 세계인의 날은 다채로운 문화교류를 통해 재한외국인 및 국민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법정기념일입니다.-출처: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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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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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의 대표적인 작품은 뭔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무반주 첼로모음곡’을 듣고 나면 ‘이게 춤곡이라고?’하는 의문이 생긴다. 첼로의 독주로 끝까지 연주되는 이 작품을 듣다보면 ‘하나의 악기가 전체의 소리를 낼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여러 다른 악기의 소리들에 방해받지 않아 온전히 첼로의 매력적인 소리를 감상할 수 있다. ‘무반주 첼로모음곡 1번-전주곡’은 이 작품 전체 중 가장 유명하고 매력적인 음악이다.-출처:동양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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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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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명예혁명은 왜 명예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명예 혁명은 영국에서 1688년에 일어난 혁명이다. 의회와 네덜란드의 오라녜 공 빌럼이 연합하여 제임스 2세를 퇴위시키고 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로 즉위하였다. 이때 일어난 혁명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명예롭게 이루어졌다'라고 해서 명예혁명이라 이름 붙였다.-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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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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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장길산의 난은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까 영화 속에 허 구입니까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거사를 도모하려 한 주모자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며 숙종 연간에 활동한 인물이다. 광대 출신으로, 광대놀이를 잘하고 용맹하여 무리를 모아 도둑의 괴수가 되었다. 처음에는 황해도 일대에서, 이후에는 평안남도 양덕 일대에서 그리고 함경도 두만강 입구의 서수리로 달아나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1696년에 서얼 출신 이영창이 금강산의 승려 운부 및 장길산과 손잡고 거사를 도모하려 한다는 역적모의 고변까지 있었으나 끝내 잡히지 않았다. 홍길동·임꺽정과 함께 조선의 3대 도둑으로 꼽힌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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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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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척과 재인은 무슨 역할,신분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재인이나 백정을 집단적으로 거주시켜 관리하고 거주지를 마음대로 벗어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백정은 재인과 화척의 합칭이지만 『경국대전』에 ‘재인과 백정’으로 쓰인 것으로 보아 화척만 백정으로 불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예능에 종사하는 재인과 도살업을 담당하던 화척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자연스럽지 않았을 것이다.-출처: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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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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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세종대왕 시기에는 백정들의 신분과 인식이 어떠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 초 세종은 국가체제 정비 과정에서 양수척 등을 양민화시켜서 국력을 증진하고 동화시키려 했다.[12] 그러한 의미에서 양수척 화척을 백정이라고 부르게 하면서 적극적인 정착유도정책을 꾀하였는데, 문제는 양수척 화척의 생활상이 일반 농민들과 너무나도 달랐다는 것이다. 즉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말을 타고 유랑하던 집단을 강제로 정착을 시키자니 개간된 땅은 부족하고, 농사일은 익숙하지도 않고, 말을 타고 무기를 휘두르던 버릇이 있으니 강도질의 유혹에 빠지고, 정착하고 싶어도 정착할만한 항산이 없는 경우도 많고, 고기를 먹고 살았으니 소고기 금지령에 대놓고 반하고 싶고, 기존의 거친 생활상으로 인하여 범죄에 대한 거부감도 약한 편이었으니 화척들은 백정에 편입되는 걸 원치 않았고 기존의 백정들 사이에서도 어마어마한 반발이 튀어나왔다. 백정들은 자신을 구백정이라 부르고 화척들은 신백정으로 구분해서 동화되는 걸 꺼렸으며 이로 인해 기존의 농민들과 신백정들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결국 시간이 흘러 구백정은 백성이라 칭하게 되고 백정이란 말은 화척들만을 칭하게 되는 단어로 남았다.-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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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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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혜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권신 바얀을 왜 쫓아낸건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혜종은 성인이 되면서 메르키트 바얀의 전횡에 반발했다. 1340년 2월, 순제는 메르키트 바얀의 조카인 메르키트 토크토아를 찾아 친정 의사를 내비쳤다. 토크토아는 고민하다가 대의를 위해 혜종을 따르기로 했다. 황제는 곧 토크토아를 이용해 그와 손잡고 메르키트 바얀을 쿠데타로 축출한 후 그를 광둥 성으로 유배를 보내 그 권력을 빼앗았다. 이후 원나라의 궁정은 거의 군벌의 내부 항쟁에 의해 움직이게 되었다. 권신 바얀을 축출한 후, 그해 6월 부다시리 카툰과 황태자 엘 테구스를 제거하여, 이들을 유배보냈다가 유배가던 도중에 사사했다. 일설에는 부다시리 카툰과 엘 테구스를 유배보낸 것은 메르키트 바얀의 뜻이라는 설도 있다.-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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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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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영화들을 보면 대부분 더빙을 다한것 같은데 이건 왜 그런걸까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과거 한국의 TV 방송 영화 더빙은 대부분 대사가 나오는 부분의 볼륨을 줄이고 녹음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의 가장 큰 문제는 '대사가 나오는 부분을 제외한 배경음악 등 모든 사운드가 안 들린다'라는 것이었다. 반대로 이를 걱정해서 소리를 다 죽이지 않으면 반대로 미세하게 원음이 들리기도 했다. 이런 방식이 90년대 중반이 될 때까지 사용됐는데, 옛날 영화는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복원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 합쳐진 형태의 모노로 녹음된 영화가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도모토 쯔요시가 주연인 일본 드라마 긴다이치 소년의 사건부 같은 경우도 작품 자체가 너무 오래된지라 M&E가 없어서 더빙이 안되었고, 애니메이션의 경우에는 마크로스의 극장판이 아예 M&E가 없어서 더빙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건버스터도 M&E가 없다고 알려져있다.-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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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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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노동당의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국회의원 이 검거되고 기소된 국회 프락치 사건 배경과 결과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49년 5월부터 8월까지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소장파’ 국회의원들 10여 명이 검거되었다. 그들이 기소된 이유는 국제연합 한국위원단에 외국군 철퇴와 군사고문단 설치에 반대하는 진언서를 제출한 행위가 남조선노동당 국회프락치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재판 과정에서 피고인 모두는 혐의사실을 부인했으나, 재판부는 고문으로 인한 허위진술의 자백 내용과 신빙성이 검증이 되지 않은 암호문서를 근거로 1950년 3월 14일에 국회의원 13명에게 모두 유죄를 선고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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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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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이전 삼한은 어떻게 삼국(고구려,백제,신라)으로 합쳐지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한이라는 용어는 삼국시대 후기에 이르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변화하였다. 주로 중국인들이 마한, 진한, 변한이 각기 고구려, 백제, 신라가 되었다고 인식[5]하였기 때문이다. 7세기 중국인들의 대고구려 삼한 호칭에 관하여에선 중국인들은 고구려를 진한으로 보거나 굴돌전 묘비에서는 마한으로 이타인 묘비에서는 변한으로 칭하기도 했다. 심지어 수서나 연남생묘비 등엔 고구려 자체를 삼한으로 본 흔적도 있다. 고려의 삼국사기부터는 삼한이란 개념을 고구려, 백제, 신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신라의 삼국 통일을 일컬어 일통삼한(一通三韓)이라 부르거나 삼국 전체를 통칭할 때 삼한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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