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는 언제 공식적으로 우리나라 영토에 편입되었을까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오래전부터 우리 영토로 확인되지만 1900년 10월 25일 칙령 41호로 선포하였습니다. 이 날을 기리기 위해 '독도의 날'로 지정하였습니다.제1조, 울릉도를 울도라고 개칭하여 강원도에 부속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관제 중에 편입하고 군의 등급은 5등으로 할 것제2조, 군청의 위치는 태하동(台霞洞)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전도(鬱陵全島)와 죽도(竹島)⋅석도(石島)를 관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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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은 실존 인물이 맞는건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임꺽정(林巪正)은 조선 명종 때의 황해도 지방의 백정 출신 도적입니다. 당시 명종의 외척 윤원형의 세도로 지방관의 수탈로 도적이 난무했고 그 가운데 우두머리입니다. 임꺽정은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 3대 도적 중 한명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1928년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의 소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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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사령관에는 왜 문관이 임명되는 일이 많았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시대는 무관을 천시하여 무관에 오를 수 있는 3품(상장군)으로 도병마사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문관의 지휘를 받아 전장에 참여하였습니다. 서희, 강감찬, 윤관은 모두 문관이고, 최영도 문관이지만 무관으로 출사했습니다.조선 시대는 진관체제하에 지방관이 군사권을 가지고 병사를 지휘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권율은 지방관으로 문관이지만 임진왜란 중 지휘관으로 활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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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은 어떻게 왕위에오를 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철종은 할아버가 은언군이 정조의 이복동생이나 삼촌 상계군 사건으로 강화도로 유배지가 옮겨진 뒤 왕족으로서의 예우를 박탈당하고 평민처럼 생활하였습니다. 모반 혐의로 조부, 부친, 삼촌이 멸문되 상황에서도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때문입니다. 안동 김씨 세도 세력은 그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위협이 되는 종친을 모두 제거했는데, 다행이 몰락 종친으로 평범한 농민이 견제의 눈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안동 김씨도 자신들의 권세 유지에 적절한 인물이 필요했습니다.두번째로는 종친의 몰락으로 영조의 직계가 소멸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왕위 계승권자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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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일본의 수도는 쿄토였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교토는 794년 간무왕(桓武王)이 헤이안쿄(平安京:京都)로 천도한 때부터 메이지 유신(1868)때까지 수도였습니다. 도쿄(東京)는 메이지 유신(1868) 직후 에도를 "동쪽의 수도"를 의미하는 도쿄로 개칭되면서 현대까지 수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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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홍경래의 난이 발생하게된 배경은?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후기지배층의 수탈로 생활이 피폐해진 농민은 점차 지배 체제의 모 순에 저저항하였아요. 처음에는 자신들의 불만을 소청, 벽서 등이 19세기 세도정치로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점차 농민 봉기라는 적극적인 형태로 발전했어요.그 대표적인 것이 홍경래의 난과 임술 농민 봉기입니다. 특히 홍경래의 난(1811)은 정부의 평안도 지역에 대한 차별과 지배층의 층의이 원인입니다. 이 봉기는 평안도 지역의 몰락 양반, 신흥 상공업 세력, 광산 노동자, 빈농 등 다양한 세력이 참여하여 한때 청천강을 장악하고 5개월간 지속되었으며, 뒤에 일어난 농민 봉기에 큰 영향을 끼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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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은 어떤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백제의 무령왕릉의 발굴은 몇가지 측면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첫 번째 백제의 왕릉은 대부분이 도굴된 상태로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무령 왕릉을 통래 백제의 수준 높은 문화 수준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고대 시기의 고분은 대부분 왕릉의 주인공과 조성 시기를 알 수 없지만 무령 왕릉은 묘지석을 통해 사서와 비교하여 정확히 주인공과 사망시기, 축조 시기를 알 수 있었습니다.묘지석의 기록에 따르면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나이가 62세인 계묘년 병술일이 초하루인 5월 7일 임진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 계유일이 초하루인 8월12일 갑신일에 등관에 있는 대묘에 안장하였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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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의 침입으로 인해 고려는 어떤 변화를 겪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는 건국 초기 북진정책 추진으로 11세기 꾸준히 영토 확장을 도모했습니다. 12세기초 여진족과의 관계도 북진 정책의 핵심은 같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윤관이 별무반을 조직하고 한때 동북9성을 축조한 것도 같은 취지입니다.그러나 1115년 여진의 아골타가 '금'을 건국하고 강대국으로 성장하면서 외교정책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1125년 금송맹약으로 요를 멸망시키고, 고려에 사대를 요구하자 문벌귀족 이자겸이 굴복하였습니다. 게다가 1127년 북송마저 금이 멸망시키면서 고려는 북진 정책이 좌절되었습니다. 이후 고려는 외교 정책을 놓고 대립(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이 있었지만 고려초 북진 정책은 좌절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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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기사환국은 어떠한 사건을 말하는 것 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6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에 의해 몰락한 남인이 1689년(숙종 15) 숙종이 장희빈(張禧嬪)의 아들을 적장자(嫡長子)로 인정하여 원자(元子)로 삼으려 하자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던 서인을 대거 몰아내고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시키면서 남인이 정권을 잡은 사건을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 합니다. 이로써 송시열이 사형되고 장희빈이 왕비로 승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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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무오사화는 무엇이고 왜 일어난 사건 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등용된 사림파(주로 3사에 진출하여 국왕을 자문함)가 날로 세력이 커지자, 훈구파와의 반목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성종실록> 편찬 사업이 시작되자, 훈구파의 이극돈이 김일손이 주도한 사초에 들어 있는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祭文)’의 내용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사실을 비방한 글이라 하여 문제삼아 유자광 등의 훈구 세력이 연산군을 충돌질하였습니다.이에 연산군이 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시체의 목을 베게 하였으며, 사림파에 속한 많은 신하들을 처형하거나 귀양보냈다. 당시 사초 때문에 일어난 사화라 특별히 모오사화(戊午史禍)라 합니다.(1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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