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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륵이란 말이 만들어진 유래는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조(위)가 유비(촉) 한중을 놓고 싸울 때의 일의 일입니다. 한중을 먼저 차지한 유비 군대의 강력한 방어에 막혀 조조의 군대는 갈수록 전지하기도 수비하기도 어려운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닭국을 먹던 조조는 먹자하니 먹을 것이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닭의 갈비가 바로 조조가 처한 상황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던 중 야간 암호를 정하려고 찾아온 부하에게 무심코 '계륵'이라는 명령을 내려버렸습니다. 부하들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주부로 있던 양수만이 조조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짐을 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그 영문을 몰라 이유를 물었고 양수는 대답하였습니다. "닭의 갈비뼈는 먹을 만한 데가 없다. 그렇다고 버리기도 아깝다. 공은 돌아가기로 결정하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계륵'은 조조와 유비의 대결에서 나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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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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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러시아 정벌 실패요인은?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전 실패 원인은 첫째 날씨 탓입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 중에 땅이 얼지 않아 대포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바퀴가 진흙에 빠져 이동에 영향을 주었고, 베레시나 강이 얼지 않아 건너지 못했다고 합니다. 둘째, 병사들의 군복 문제입니다. 군복의 주석 단추가 제대로 달려있지 않아 체온 유지가 어려웠어요. 세째, 러시아의 청야 전술로 물자와 식량의 보급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실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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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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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왜 오른손을 숨기고 사진을 찍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 자세는 황제의 독특한 습관이 아니라, 당시의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18세기에 누군가가 초상화를 의뢰할 만큼 지위가 높은 중요한 인물이었다면, 옷에 한 손을 집어넣고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숨긴 손’ 포즈는 18세기에 부유한 상류층 젊은이들 사이에 유럽의 명소를 방문하는 ‘그랜드 투어(Grand Tour)’가 유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의 의상과 행동에 친숙해졌다고 합니다. 그 결과 오른손을 옷 속에 숨긴 자세가 더 품위 있게 보인다는 생각이 널리 퍼진듯하다고 추전합니다. 19세기엔 사라진 이 자세를 20세기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도 선호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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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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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게르니카 그림 작품해석좀 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의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의 이름입니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내란 중 독일의 히틀러가 독재자인 프랑코를 지원하는 무차별 폭격으로 2천 명이 넘는 시민이 사망하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습니다.이 소식을 들은 피카소는 같은 해에 열리기로 예정된 파리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 벽화 제작을 의뢰받은 상태였습니다. 피카소는 게르니카의 참사를 알리고자 부조리와 비극을 주제로 한 거대한 벽화를 한 달 반 만에 완성하고 작품의 이름을 <게르니카>로 하였습니다.작품은 흰색, 회색과 검정색만 사용하여 가라앉은 분위기를 조성하고, 단색 대비를 통해 절망과 비극을 극대화하였습니다. 왼쪽 죽은 아이를 안고 절규하는 여인, 그 옆에 관객을 응시하고 잇는 황소와 괴로워하는 말, 공포로 두려움에 떠는 두 여인과 불이 난 집에서 떨어지는 여인이 있습니다. 바닥에는 사지가 절단된 병사 등을 통해 잔혹함과 혼란한 상황을 묘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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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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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시대에 시도한 서울진공작전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반적으로 서울 진공 작전은 1908년 13도 창의군의 작전을 말합니다. 그런데, 질문에서 일제강점기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국내 진공 작전에 대해 궁금한 듯합니다. 국내 진공 작전은 1945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이 미국 전략첩보기구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와 합작해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합니다. 4월 3일 OSS측 실무자인 싸전트(C. B. Sargent) 대위가 제2지대장 이범석, 제3지대장 김학규 등과 함께 임시정부 청사로 김구 주석과 광복군 총사령 지(이)청천을 방문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구 주석은 “임시정부의 요원들이 동반한 연합군의 한반도에 대한 공격작전을 지원한다”고 함으로써 독수리 작전을 승인했습니다. 독수리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광복군 대원들은 OSS 특수훈련을 받았습니다. 7월말 제 1기생 50명이 훈련을 끝내고, 8월 1일 2기생 50명의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8월 5일 김구 주석은 OSS훈련이 끝난 1기생 대원들의 국내 진입작전을 미군측 OSS 총책임자 도노반과 논의했습니다. 훈련이 종료된 1기생들은 8월 20일 안에 특공대를 조직, 낙하산이나 잠수정 등을 통해 한반도에 침투시킨다는 계획입니다. 그러나 독수리 작전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여 안타깝게 실행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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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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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북해도는 원래 일본이 아니었다는데 맞는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이누족은 1만년 전 일본 열도에 정착했습니다. 그런데 아시아 본토에서 건너간 도래인(야요이)들과 섞여 일본 문화를 형성하고 섞이지 않은 아이누족이 점차 북쪽 훗카이도, 류큐로 이주하여 그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막부 시대에 일본 개척으로 말미암아 에조치(아이누 거주지)는 계속 줄었으며, 마쓰마에번은 홋카이도 남부까지 진출하여 거주지를 이루었습니다. 유신 말기 도막파에게 패배하여 피신한 좌막파의 잔존 세력이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일본 역사에서 등장한 최초이자 마지막인 공화국인 에조 공화국이라는 새 정권을 세우고 하코다테에 수도를 두어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신정부군에 토벌당하고 다시 본토에 편입하였습니다. 이후 아이누 민족은 빠르게 일본인과 동화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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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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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가까운 북해도에 실던 사림들은 원래 누구였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북해도(훗카이도)의 원주민은 '아이누'라는 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입니다. 아이누족은 훗카이도, 도호쿠 북부(아오모리현, 아키타현, 이와테현), 그리고 사할린, 쿠릴 열도, 캄차카 반도 지역에 분포하여 거주하는 민족을 말합니다. 현재 훗카이도에 거주하는 아이누족은 12,000명 정도 집계된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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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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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헤이그특사 파견에 대해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을사늑약 체결 직후 고종은 1905년 11월 26일 고종은 헐버트(Hulbert, H.B)를 통해 을사늑약이 무효라는 긴급 전문을 미국 워싱턴으로 보냈지만, 미 국무성은 헐버트의 전달을 묵살합니다. 그러나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사실을 알고 특사단 파견을 통해 국제사회 여론에 대한제국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합니다. 고종은 이준, 이상설, 이휘종을 파견합니다. 비록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회의장에 입장은 못했지만, 고종의 친서를 평화회의 제1분과위원장에게 전달하였으며, 호소문을 각국의 대표와 외신기자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그리고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참석, 발언을 할 수 있었습니다.영국, 미국은 냉랭하였고, 러시아도 처음에는 적극 협력하였지만 포츠머스 강화 조약으로 외면합니다. 그러나 각국의 언론은 특사단을 후원하고 동정하였으며, 영국 언론인 스테트는 수차례 특사에 관한 기사를 게재하고 언론인과 접촉 및 언설할 수 있어 일본의 침략 행위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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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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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제 국가와 내각책임제 국가의 차이점은?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통령제 국가와 내각책임제 국가의 차이점은 행정부(내각)을 누가 구성하는냐 달려 있습니다. 내각 책임제를 다른 말로 의원내각제라고 하는데, 의원들이 내각을 구성한다는 것입니다. 즉, 다수당을 차지한 정당이 내각을 구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수당의 대표가 총리(수상)이 되어 각부 장관 등 내각을 구성합니다. 대통령제는 의회와 분리되어 있지만 내각책임제는 서로 유기적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내각책임제는 사법부와 집행부의 2권 분립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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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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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민복장은 한복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백성의 대부분을 이루었던 상민은 농사를 짓거나 물건을 만들고 장사를 하는 생산 활동에 종사했습니다. 이들은 아무 무늬도 없는 면직물의 옷을 입었으며 모자 없이 맨 상투를 튼 머리에 짚신을 신었습니다. 양반들과 달리 평민은 외출할 때 도포는 입을 수 있어도 두루마기는 입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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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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