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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가 원나라와 달리 오래 지속될수 있던 원동력과 배경이 무엇일까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만주족이 건국한 청은 피정복민에 대해 강온 양면책을 효율적으로 활용했습니다. 강경책으로 호복과 변발을 강요하고, '문자의 옥'과 같은 사상 탄압을 하였으나 과거제, 대규모 편찬 사업에 한족을 중용하고, 만한 병용제를 통해 한족도 고위 관직에 등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은 '몽골인 제일주의'로 한족을 천시, 탄압하여 홍건적의 난으로 붕괴됩니다.두번째는 청은 향촌에서 중간층으로서 한족 지배층인 '향신'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그들을 통해 향촌에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였습니다.세째, 왕조의 안정성입니다. 원은 '말자 상속제'로 황제권 다툼이 잦았지만 청은 '태자밀건법'으로 정치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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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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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은 어떻게 정권을 잡았는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첫째, 안동 김씨의 왕족 견제에 대해 흥선대원군은 보신책으로 스스로 파락호 또는 궁도령라고 조롱거리가 되어 안동김씨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두번째는 철종이 왕자가 없었으며, 아버지 남연군이 비록 정조의 동생 은신군의 아들로 입적하지만 당시 흥선군은 종친 가운데 가장 가까운 범주에 해당하는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째 철종이 후사 없이 병약해지자 효명세장의 비인 조대비에게 접근하여 둘째아들 명복(고종)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조대비는 안동 김씨에게 빼앗긴 세도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라 여겨 흥선군과 교감할 수 있었습니다. 1863년 철종이 죽고 조대비의 양자로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지고 어린 고종의 섭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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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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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선 어느시기부터 성리학이 들어오게 된건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가마쿠라 막부 후기 무사가 지배하던 일본에서도 성리학이 전해졌지만 사회전반까지 미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무로마치 막부의 일부 선종 승려들을 중심으로 연구되었습니다. 특히 후지와라 세이카는 정유재란 때 포로로 끌려간 강항을 만난 후 유학자로 변모하게 됩니다. 그는 강항의 도움을 받아 일본 최초의 사서오경 주석본인 <사서오경왜훈>을 발행했습니다. 또한 그의 제자 하야시 라잔은 에도 막부에 등용되어 막부의 각종 제도와 의례 정비에 일조하였습니다. 에도 막부는 성리학을 관학으로 삼아 적극적으로 보호하였으며, 사농공상의 신분적 차별을 인정한 성리학이 무사중심의 사회를 유지하는데 근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교와 신토의 영향이 큰 일본 사회에서 관혼상제를 비롯한 각종 의례 등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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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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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서경천도운동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종대 금과 군신 관계를 맺고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면서 궁궐이 불타면서, 인종의 권위는 실추되고 민심도 크게 동요하였습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인종은 승려 묘청과 문신 정지상 등 서경 세력을 측근으로 이용하여 개혁 정치를 추진하고, 정국을 수습하고 왕권을 재정립하려 하였습니다. 묘청 등 서경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앞세워 서경 천도를 적극 추진하게 됩니다. 또한 보수적인 문벌 귀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서경에서 자주적인 혁신 정치를 추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의 주장대로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면 금이 굴복하고 주변의 나라들이 조공을 바칠 것이라며,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나라의 연호를 정하는‘칭제 건원(稱帝建元)’과‘금국 정벌’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개경 문벌 귀족의 반대로 서경 천도가 불가능해지자, 묘청 등은 국호를‘대위’, 연호를‘천개’로 정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1135). 이들은 서북 지방의 대부분을 점령하는 등 한때 위세를 떨치기도 했지만,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게 1년 만에 진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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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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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사치와 향락을 즐겼는데 당시그는 많은 사치재를 어디서 구해왔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연산군은 자신이 머무르는 궁궐을 비롯하여 서울 일대의 주요 명승지를 사치와 쾌락의 공간으로 리모델링한 인물입니다.그 가운데, 궁궐도 연회 장소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연산군일기>에는 경복궁 경회루에서 연산군이 자주 잔치를 베푼 모습들이 나타나 있다. “경회루 연못가에 만세산(萬歲山)을 만들고, 산 위에 월궁(月宮)을 짓고 채색 천을 오려 꽃을 만들었는데, 백화가 산중에 난만하여, 그 사이가 기괴 만상이었다. 그리고 용주(龍舟)를 만들어 못 위에 띄워 놓고, 채색 비단으로 연꽃을 만들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연희를 즐기기 위해 흥청 수백명을 동원했다고 합니다.이런 잔치의 흥을 돋구기 위해 연산군의 전국에 임사홍, 임숭재 부자처럼 '채홍사'를 파견했다고 합니다. 이때 뽑힌 기녀들을 운평(運平), 가흥청(假興淸), 흥청(興淸)이라고 하였습니다.(예, 장녹수)그리고 궁궐은 물론 궁궐과 가까이 연회를 열 수 있도록 정자를 만들고 꾸몄다고 하는데, 창덕궁 후원을 사치와 쾌락의 공간으로 만들었으며 텅춘대, 서총대 등의 정자를 건설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도감을 설치하고, 수많은 역부를 동원하였다고 합니다. 그외에도 응준방을 두어 팔도의 매와 진귀한 새, 짐승을 포획하여 궁궐, 정원의 볼거리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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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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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은 당시 사대부들이 왕으로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성종에게는 16명의 왕자가 있었지만 폐비 윤씨의 이후 왕비로 간택된 세번째 왕비 정현황후 윤씨 사이에 낳은 진성대군 이외는 후궁 소생입니다. 연산군이를 폐위하고 성종의 적자로서 진성대군은 왕위 계승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유일한 대안이었습니다. 특히 당시 사대부들이 신봉했던 성리학 사상을 바탕이 반영되었습니다. 사대부들은 <맹자>의 국왕이 잘못하여 천명을 잃을 경우, 왕위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혁명’ 사상을 반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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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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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은 어떠한 이유 때문에 일어난 전쟁 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거란족이 세운 요는 고려를 크게 993년(성종12년), 1010년(현종 원년), 1018년(현정 9년)의 3차례에 걸쳐 침략했습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발해와 우호관계에 있던 거란이 배반하여 멸망시키자 단교를 선언하고, 오히려 북진 정책으로 적대시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거란이 보낸 사신단을 섬으로 유배시키고 낙타를 만부교 다리 밑에 굶겨 죽이기 까지 하였습니다.그런데, 요가 고려를 견제하고 침략까지 한 이유는 5대 10국을 통일한 송의 등장이 계기입니다. 게다가 고려는 북방의 요와 송이 대립하는 형세가 되자 송과 친선 관계이며, 배후인 고려를 견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요는 송을 공격하기에 앞서 고려와 관계 개선을 시도하였으나 뜻대로 되지않자,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였습니다.(1차 침입 / 993년) 고려는 서희의 담판으로 송과 관계를 끊기로 약속하고, 그 대가로 강동 6주를 획득하였습닏다. 그러나 고려가 송과 친선 관계를 계속 유지하자, 요가 다시 침입하였습니다.(2차 침입 / 1010년) 이때 개경이 함락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던 고려가 신하의 예를 갖춘다는 조건을 제시하자, 요는 이를 받아들이고 물러갔습니다. 이후 요는 현종의 입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고려가 이를 거절하자 다시 침입하였습니다.(3차 침입 / 1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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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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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과 견훤의 전투인 팔공산 전투는 왜 일어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팔공산 전투(927) 지금의 대구 광역시 팔공산 일대에서 후백제(견훤)과 고려(왕건) 사이에 벌어진 전투입니다.당시 신라는 견훤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경애왕은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몸소 원군을 이끌고 경주로 향하였지만 후백제군이 먼저 경주를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약탈하였으며 경순왕을 세우고 철수하였습니다.(포석정 이야기)뒤 늦게 경주에 도착한 태조 왕건은 신라인들의 슬픔을 애도하고 되 돌아오던 중 대구 팔공산 일대에서 후백제의 견훤군과 일전을 벌이게 됩니다. 그러나 견훤군에게 대패하고 왕건은 신숭겸의 살신성인으로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신숭겸이 왕건의 옷을 바꿔 입음)팔공산 전투에서 승리한 백제는 경상도 일대를 장악하고, 패권을 잡을 수 있었으나 신라와 고려가 친밀해지고, 호족들의 반발이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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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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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대비와 폐비윤씨는 극도로 좋지 않았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폐비 윤씨는 연산군의 생모로 성종의 후궁으로 있다가 숙의로 봉해졌고, 성종의 총애를 받아 1476년 왕비로 책봉되고, 연산군을 낳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왕비가 된 이후 투기가 심해 부덕한 일(성종의 총애를 받는 엄귀인과 정귀인을 저주하는 주술)을 자주 일으켰고, 결국 왕과 후궁을 독살하려 한다는 협의로 빈으로 강등됩니다. 사실 성종에게는 많은 여자들이 있었고, 이를 지켜본 왕비(윤씨)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습니다. 1479년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으며, 성종의 모친인 인수대비(소혜왕후)에게 격분하게 되고, 폐비에 이릅니다. 그런데, 오히려 성종이 적극적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인수대비는 아들의 의견에 따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정희왕후(세조비), 인수대비 등 후궁들을 모함하면서 세자의 생모임에도 사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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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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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럼이란 어떤 어원을 가지고 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부럼깨기'는 정월 대보름 아침 일찍 일어나 호두·잣·밤·땅콩·은행 등 딱딱한 것을 깨물면 '1년 내내 무사태평하고 부스럼(종기)이 나지 않게 해 주소서' 또는 "치아를 튼튼하게 하고 일 년간 부스럼과 종기가 나지 않게 해주소" 하며 빌던 민속입니다. 부럼깨기를 통해 1년동안 건강한 치아와 부스럼이 나지 않도록 하는 기원에서 비롯되었습니다.여기서 호두, 잣, 밤, 땅콩 같은 것을 '부럼'이라고 하였으며, 부스럼(종기)에서 어원을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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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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