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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음악사에 흐름은 어떻게 되나요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부터 있던 음악 기관인 전악서와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아악서에서 국가의 음악행사를 주관하다가 이 둘은 후에 장악을 서로 합졌고, 세종 때 박연이 중심이 되어 아악을 정리하였고 아악에 필요한 악기도 새로 만들어졌습니다.그리고 정간보라는 악보를 창안하는데 이 기보법은 그 이전까지의 악보가 음의 길이를 표시하는데 매우 미흡했던 점을 보완한 것으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정종 때 악학궤범이 만들어 졌는데 이 책은 성현, 신말평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것으로 음의 원리와 방법, 악기, 의식에 관련된 도구 무용 등 다방면에 걸친 음악제도를 정리하였습니다.세종, 성종 때 크게 발전한 아악은 연산군의 폭정과 임진왜란 등의 수난기를 거치면서 점차 쇠퇴하게 되었으나 예종에 이르러 부흥의 기운이 일어나 가곡, 가사, 시조, 판소리 등의 성악과 산조, 시나위 등의 기악이 새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또, 민속악이 차차 일어나고 체계적으로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기악과 일반 서민층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민속악이 번성해 우리 음악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고, 외국의 영향을 받지 않은점도 이시대의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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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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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에 인터넷 회사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국통신(현KT)에서 코넷이라는 이름으로 WWW기반의 인터넷 상용서비스를 최초로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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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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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와 신간회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민회는 비밀결사고 3.1운동 이전에 있었던 단체이며 신간회는 공개적인 단체로 좌우 합작, 시기적으로 3.1운동 이후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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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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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없는 아우성’ 이라는게 무슨 뜻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우성은 떠들썩하게 기세를 올려 지르는 소리로 아우성의 본질은 소리 입니다.소리없는아우성은 소리없는 소리라는 말이므로 문법적으로는 틀리지만 맥락을 고려하면 이해가 가능하여 역설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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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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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에는 왜 대나무 많나요?지역특성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담양에 대나무가 많은 이유는 풍수지리적으로 봉황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봉황의 먹이가 바로 대나무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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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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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선생님의 대동여지도를 만드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김정호는 우연한 기회에 고을 지도를 얻게 되는게 지도와 실제 지형을 비교하니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게 되었고, 서울에 정확한 지도가 있다는 말만 듣고 서울로 올라가 규장각에 있는 조선팔도 지도 한벌을 얻었지만 이도 실제 지형과 차이가 있었습니다.그래서 김정호는 직접 지도를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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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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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나 서울근교 괜찮은 미술관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서울근교에 있는 미술관으로는 리움 미술관, 디뮤지엄, 소마 미술관, 뚝섬 미술관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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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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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가 안되네요 방법이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본인이 요즘 가장 관심있는 분야나 사회 상황이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하거나흥미, 특기, 취미를 먼저 생각해보시고 그에 맞는 분야의 책을 먼저 읽어가면서 책을 읽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다만, 많은양을 읽는다거나 오랜 시간 읽는 다는 생각은 버리고 내가 흥미를 느낄수있는 시간이나 양까지만 읽어내려가며 점차 늘려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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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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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퍼즐은 어떻게 기원됐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퍼즐은 1760년 영국의 지도제작회사에서 나무에 그려놓은 지도를 작은 조각으로 자른것이 퍼즐의 유래입니다.당시 퍼즐은 나무로 만들어 한번의 톱질로 한 조각씩 만들었기때문에 제작시간이 오래 걸려 상류층에서 즐기는 고급놀이로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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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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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부인을 여러명 (첩)들이는것이 합법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은 일부다처제가 아닌 일부일처제였고, 정확히 말하면 일부다첩제 였습니다.조선은 공식적인 복혼제는 아니지만 일부일처제에 대한 또 하나의 대안으로 첩제도가 등장했는데 이는 첫 배우자인 본처와의 혼인관계는 그대로 지속하면서 비공식적으로 첩을 두는 관습으로 사회 공공연하게 용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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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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