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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독립군 중에 공군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정말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국 독립군 공군은 조국 독립을 위해 1919년 미 북가주지역에서 처음 결성, 1920년 2월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이 주축이 되어 미국의 캘리포니아의 윌로우스에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해 SJ-1를 훈련기로 한인 조종사 훈련을 실시, 최초의 조종사 6명이 탄생했으며 40여 명의 조종 훈련생을 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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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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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대 카르트 하다쉬트의 장군으로 세계사에서 카르타고를 대표하는 위인이자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한명입니다.조국 카르타고를 꺾은 강대국 로마를 소수의 용병만으로 연파해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로마 최대의 숙적이자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이 우는 아이를 나무랄때 자꾸 울면 한니발 아저씨가 잡아간다 였습니다.사실상 제 2차 포에니 전쟁의 주인공으로 제 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바르카 혼자 철천지 원수 로마의 멸망을 목표로 기획하고 수행한 것이나 다를 바 없어 다른 이름으로 한니발 전쟁이라 불리며, 조국 카르타고의 전략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는 과감한 전략으로 이탈리아 본토로 들어가 전설적인 활약으로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로마를 멸망시키지는 못했고 결국 로마의 장군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자마 전투에서 패했습니다.하지만 카르타고는 패전했음에도 그는 지금까지 명장으로 칭송받는데, 전쟁 결과와 별개로 그의 뛰어난 지휘력과 전설적인 전과는 부정할수 없고 당대의 적국이었던 로마도 그를 명장으로 칭송합니다. 무엇보다 한니발에게 호되게 당하면서 보병과 기병의 유기적 운용을 뼈저리게 습득해 군대에 보급한 로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지중해의 강대국들을 모조리 쓰러트리는 군사강국으로 성장, 따라서 한니발은 본인의 의도와 달리 로마의 성장에 누구보다 많이 기여한 인물이 되었습니다.오늘날 그의 조국인 카르타고, 그가 싸운 포에니 전쟁, 그를 꺾은 스키피오는 거의 몰라도 한니발과 알프스 원정은 아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그 명성이 이어지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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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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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은 왜 일제에 의해서 그렇게까지 망가져야 했던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총독부가 발간한 경성도시계획 공원표를 보면 일제는 창경궁 외에 대한제국의 궁궐들을 각각 경복원, 창덕원, 덕수원으로 변경해 대중에게 공개할 의사가 있었습니다. 도심지에서 새로운 부지를 확보하는 것 보다 이렇게 하는 편이 즉각적으로 공원을 조성시킬숭있고, 상징적 의미가 있는 궁궐을 유원지화시키고 대중에게 공개함으로써 조선 왕조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기존 질서를 부정시키는 효과가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도 해외에 일본이 대한제국 왕가를 융숭하게 대접하고 선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일본은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과 위와 같은 실제 의도들로 창경궁 개조를 단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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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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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선 만두를 주로 쪄서 먹는게 대중적일까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원전 550년 메소포타미아 문명 자리에 번성했던 페르시아 제국은 사각형으로 만든 무발효 밀반죽 위에 다진 고기와 양념을 속을 채워 먹는 요리인 요시파라라는 요리를 먹었고, 이 요시파라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퍼져 시시바라, 추츠바라, 두시바라, 최츼라 등 다양한 만두 조리법의 어원이 됩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의 한나라와 교역했고, 실크로드를 따라 만두가 중국으로 전래되는데 , 그 과정에서 물이 부족한 중앙아시아, 중동 지역에서는 화덕에 굽거나 튀기는 방식으로 바뀝니다.중국인들은 이 음식을 이민족의 밀가루 음식이란 뜻의 후빙이라 불렀고 이 후빙은 시간이 지나며 중원의 음식으로 정착, 중국 문화와 융합을 이루어 현재의 지엔빙, 웨빙이 됩니다.후빙은 중앙아시아의 굽는 방식에서 벗어나 물이 풍부한 중국 문화권의 삶고 찌는 조리법과 결합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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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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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에서 색목인을 계급층으로 둔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색목인은 중국 원나라에 있던 신분제도상의 분류로 위구르, 탕구르, 튀르크, 이란, 아랍 등 좁게는 중앙아시아에서 넓게는 유럽인까지 중국에서 봤을때 서쪽에 사는 사람들이 원나라에 살게 되면 이 분류에 속했습니다.읻르은 중국의 한인, 남인보다 일찍 귀복해 제국 창업의 공로를 인정받았고 중국 민족 견제의 필요성에 의해 준지배계층으로서 우대받았습니다.기존의 다른 제국들과의 차별점이 필요했고, 원나라 건국에 이들 서방계 민족 출신들이 공로한 바가 컸기에 일종의 귀화 정책 중 하나로 만든 제도였으며 공무원, 장교 등이 될 수 있던 건 기본, 그 밖에 다른 직업들을 자유롭게 가지고 경제활동이 가능했습니다. 특히 상인 계층의 경우 역대 궁국 역사상 그 어떤 나라도 원나라만큼의 자유를 보장해주지 못했다고 전합니다.특히 몽골의 지방행정조직인 행성의 인사권은 중앙에서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행성의 최고권력은 몽골인과 색목인이 양분했으며 특히 재정 부분은 거의 색목인들이 담당하기도 했으며, 색목인 중 원나라 중앙권력에 편입되어 재상들을 배출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현재의 타지키스탄 출신으로 쿠빌라이 칸의 재정장관으로 임명된 아흐마드 파나카티, 페르시아 출신의 승상 다울라트 샤 등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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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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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시호는 누가 만들었고 언제부터 붙이게 된 건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시호는 일반적으로 중국 주나라때 시호의 법도를 처음 정했다고 알려져있으며, 천자 뿐 아니라 제후, 경대부, 고관, 저명한 유학자 등에게 내려졌고 시대가 흘러 고승도 대상이 되었습니다. 한국사에서는 삼국시대의 군주들에게 시호를 올린 것이 최초로, 신라에서는 지증왕이 죽은 514년 처음 시호를 올렸다고 합니다.시호는 죽은 인물에게 국가에서 내려주거나 죽은 군주에게 다음 군주가 올리는 특별한 이름으로 동양의 군주제 국가에서 시행되었습니다.시호를 내리는 목적은 여러 신하의 선악을 구별해 후대에 권장과 징계를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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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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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자살설 사실인가요.설왕설래하던데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순신의 극적인 최후로 자살 의도설, 사망 위장 후 은둔설 등 여러 낭설이 있으나 근거는 없으며, 자살 의도설은 이순신의 행장에 면주, 투구를 벗다라는 표현이 있어 이순신이 죽으려고 일부러 갑옷을 벗고 전선에 나갔다는 추측이 난무했지만 胄는 갑옷 전체가 아니라 투구만 일컫는 말이며 免胄란 어휘 자체가 좌전을 출처로 하여 사력을 다해 싸우다 란 뜻의 관용어임이 알려지만서 부정적인 견해가 주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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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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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유목민족은 어느민족이며 어느시기와 어느지역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최초의 유목민은 스키타이 입니다.오늘날 러시아 남부, 캅카스 동부, 유크라이나와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역에 거주했던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유목민족으로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들 스스로는 스콜로트라고 불렀으며 스키타이는 그리스인들이 부른 말로 그리스어로 궁수에서 유래되었습니다.이들은 이란계 유목민족이었으나 기원전 11세기 쯤 유입된 다른 이민족들과 섞이며 스키타이라는 정체성이 생긴 것으로 추정되며, 최초의 기마 민족으로 채리엇이 아닌 직접 말을 타고 이동하며 싸웠다고 합니다.이들이 처음으로 활동을 시작한 기원전 9세기 즈음 킴메르족이라 불리는 다른 유목 민족이 있었는데 스키타이인들과 경쟁을 반복하던 중 스키타이의 기술이 좋아지고 수가 많아지자 기원전 7~6세기에 걸쳐 키메르인들을 캅카스 지역 너머로 몰아내고, 텅빈 캅카스, 카르파티아 산맥도 넘으며 동서남북으로 크게 세력을 확장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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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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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미술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0세기 초 통일신라에 이어 성립된 고려도 치국의 정신적 배경이 불교에 있던 만큼 이 시기에 생산된 미술 작품 역시 직접 불교와 관련이 있음은 물론, 일상 용구에 이르기까지 불교적인 색채가 농후하게 반영됩니다.즉 , 사원 건립의 성행으로 많이 세워진 당탑은 물론 이에 부수되는 각종 건조물과 상설, 불교 행사에 필요한 불구들은 직접 불교과 관련된 작품들이기에 말할 나위 없으나, 도자기와 와전에까지도 불교와 직결되는 문양이 채택되거나 불교적인 정신세계가 문양을 통해 표현되었습니다.불교를 바탕으로 하는 정신세계를 배경으로 그들이 남긴 미술 작품에는 시기에 따라 양식으로 변화하는데 그 변화는 무신정권의 성립을 기준으로 하여 크게 전기, 후기로 나누어 생각할수 있습니다. 전기는 신왕조 건설에 따르는 기백과 의욕에 넘쳐 건실한 작풍이 나타난 시기로 석탑이나 석불의 제작에서 거대한 작품들이 나타나고 부도에서는 정교한 표면장식이 , 공예부문에서도 청자의 비약적인 발전과 각종 금속제품의 발달로 나타났는데 그 절정기는 문종 때인 11세기 중엽으로 보입니다.이에 비하여 후기가 되면 목조건축의 가구형식의 변화, 도자기 요법의 변화, 서화에서의 원의 서법이나 화법의 추종, 불상조각의 퇴보와 새로운 양식의 도입 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여러 방향에서 고찰되나 정치의 문란, 종교관의 변화, 중국 원나라 미술의 침투 등을 들수 있으며 양식의 변화가 반드시 퇴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나 한국 미술 전체 흐름으로 보면 전기에 나타났던 새로운 방향으로 활발한 진전은 후기에 와서 창조로의 연결을 보지 못하고 오직 변화에 그치고 말아 일부를 제외하고 쇠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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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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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스의 전신인 무슬림 형제단은 어떠한 단체였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이슬람 운동 단체로 1928년 이슬람학자인 하산 알 -반나가 이집트의 이스마일리야에서 창설했습니다.당시 하산 알-반나는 이집트와 이슬람의 쇠퇴 원인은 무슬림이 이슬람 원리를 따르지 않았기때문으로 보았으므로 서구화, 세속화에 반대하며 정통 이슬람으로 회귀하고 진정한 이슬람의 가치 구현을 목표로 했습니다.1930년대 말 이집트 전 지역으로 조직망이 확대되어 회원수는 약 50만명에 이르며 1932년 본부를 카이로로 옮기고 이슬람 원리에 어긋나는 정치, 행정체계의 구조적 개혁을 요구하였고 법률 개정 등 사회 개혁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집트 내에서 최대의 이슬람 조직으로 확대되며 점차 영향력이 커지자 정부는 단체의 해체를 촉구하며 탄압, 1939년 단원들은 정부의 탄압을 받으며 사회운동조직에서 정치운동조직으로 재편합니다.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 더욱 과격화되는데 1954년 이집트 정부는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 암살 시도의 배후로 단체를 지목, 불법단체로 규정하나 지하 조직으로 이집트 뿐 아니라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국가에서 비밀결사 운동 단체로 활동했습니다.1984년 사회노동당으로 의회 진출을 시도하여 성공, 2005년 전체 의석의 20%가량인 88석을 확보,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무하마드 호스니 무바라크의 정권이 무너지고 무슬림형제단은 자유정의당을 창당해 이집트 역사상 처음으로 합법적인 정당이 되었고 총선에서 498석 중 235석을 확보, 2012년 모하메드 무르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첫 이슬람 정권이 탄생합니다. 그러나 2013년 이집트 군부의 쿠데타로 무슬림형제단은 다시 탄압받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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