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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란 인물이 궁금합니다. 결국 거란을 이겼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제 2차 여요전쟁으로 1010년 침공은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요 성종이 친정을 나서 강조가 이끌던 30만 고려군이 통주 전투에서 대파되고 그 여파로 개경까지 함락, 고려 현종이 몽진 하는 등 나라가 멸망 직전까지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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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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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시 사망자는 총 몇명 정도나 되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전쟁 기간동안 남한과 북한을 합쳐 약 300만명 가까이 사망 또는 실종, 미군 사망자도 45000명에 이르는 등 기간에 비해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습니다.한국군의 사망자수는 137,899명 , 유엔군 4만 670명으로 총 17만 8,569명북한군 52만명, 중공군 11만 6천명으로 총 63만 6천명 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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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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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교회가 적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6세기 가톨릭, 19세기 개항 이후 개신교가 전파되나 에도 막부와 일본 제국 당국의 박해, 토착 다신교로 인한 외래 유일신 종교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특성과 일본인 특유의 권하는 것도 거절당하는 것도 창피스러워하는 문화로 선교가 힘들기 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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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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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을 폭군이라고 할 만한 근거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조반정 세력이 광해군을 축출하기 위해 세운 명분 중의 하나가 폐모살제라 불리는 친족에 대한 무자비한 견제였는데 형인 임해군을 독살, 조카인 능창군과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을 유배보낸뒤 사실상 목숨을 빼앗았으며 인목대비를 서인으로 강등하여 서궐인 경운궁에 유폐시키는 패륜을 저질렀다는 주장인데, 임해군, 능창군, 영창대군을 죽이도록 광해군이 직접 교사했다는 사료는 없습니다.사실 실록에 등장하는 영창대군 살해 진상은 때에 따라 다르며, 영창대군 사사에 연루된 인사들 중 영창대군 살해에 가담했던 정항 등 상당수는 훗날 인조반정 공신들에 의해 복권됩니다.어느쪽이든 당시 정황상 심증으로 광해군으 그랬을 거라 취급하는 것이며 또한 반정 세력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처럼 몰아간 면도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저들은 모두 유배지의 현지 관리가 왕명과 무관하게 임의 살해한 것으로 기록, 당시 대북의 수장이던 기자헌의 소행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다만 영창대군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강화 부사 정항 등 의심자들에 대해 딱히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고 이것이 광해군이 내심 이들의 행위를 두둔했다는 것이 근거로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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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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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역사에서 결혼이라는 것은 언제부터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시시대 난혼, 군혼이 있었다고 하나 우리나라에는 그것에 관한 기록이 없으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고대 한반도의 여러 나라에 형사처수혼, 족외혼, 축첩, 솔서혼, 에부혼 등이 있었던 기록이 있으며 그 가운데 서옥으로 표현된 남귀여가혼은 가장 일반적인 한국의 혼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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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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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때 현종을 황제로 세운 강조란 장수는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강조는 강장자 가문 사람인 강태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강태주는 태조 왕건의 먼 외척으로 강호경과 강충, 강보전의 후손이었으나 가계가 불분명합니다.강조가 태어날 무렵 그의 일족 중 왕비가 나왔고, 태조 왕건은 자신의 먼 친척이기도 한 신천의 호족 강기주의 딸을 22번째 부인인 신주원부인으로 삼았는데, 강조는 신주원부인의 친정 일족이었습니다.983년 성종 임금의 하급 궁료로 천거된 이후 991년 무관으로 관직에 본격 출사, 997년 고려 제 6대 군주인 성종이 후계를 이을 아들이 없이 죽고 목종이 보위에 오르자 이때 왕의 나이가 아직 18세임에도 불구하고 모후인 천추태후가 섭정을 하게 됨에 따라 외척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앞서 천추태후와 추문을 일으켜 유배되었던 김치양도 다시 불려와 중용, 김치양은 마음대로 정치를 하면서 1003년 천추태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는데 이때 그는 여러 관직을 거쳐 중추사 우상시로 있었으며 외직으로 나가 서북면도순검사가 됩니다.목종이 병석에 누워있으면서 김치양의 계획을 알고 황보유의를 파견해 대량원군 순을 맞아 오게 하고 또 전중감 이주정이 김치양에게 아부하는 것을 알고 임시로 그를 서북면 도순검부사로 임명해 보내면서 즉일로 다시 강조를 궐 내로 불러들여 숙위하도록 했습니다.목종은 대량원군 순을 후계자로 삼고, 궁궐 수비를 위해 중추사 우상시 겸 서북면 도순검사인 강조에게 개경의 궁월을 수비케 했고, 이때 세간에서는 목종이 위독한 틈에 김치양 등이 나라를 빼앗으려 하다는 풍문이 돌았고 왕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전해지자 강조는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오던 도중, 평주에서 왕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보고를 듣고 한때 주저했으나 부하 장수들과 회의 후 개경으로 가 목종을 퇴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이와 함께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태후와 그 무리들을 귀양보냈으며, 양국공으로 폐했던 목종을 죽였습니다.이어 왕실의 부패를 척결하고 새로이 관제개혁을 실시, 국왕의 측근 보좌기구인 은대와 중추 남북원을 일시에 혁파하고 대신 중대성을 설치, 이때 중대사에 올랐으며 1009년 이부상서참지정사가 되어 당시 제일의 실력자가 됩니다.강조의 정변 이후 1010년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황제 성종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 강조는 통주에서 30만의 군사로 거란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고 사로잡혔고, 장수 이현운과 함께 포로가 됩니다.거란의 황제였던 성종은 강조의 인품을 보고 자신의 신하가 되어 권력을 누리자는 제안을 하나 이현운 장군만 응하고 강조 장군은 끝까지 제안을 거절하다 처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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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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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종때 일어난 임술민란은 어떠한 이유 때문에 일어난 것 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임술민란은 1862년 조선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농민봉기로,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심화된 체제모순이 해결되지 않은 채 수백년이 흐른 상태였고, 이 과정에서 세금 제도의 문란 및 지배계층의 횡포가 자행, 피지배 농민 계층의 생활고는 가중되며 불만이 누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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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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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간토대지진은 어떤재앙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간토 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 , 일본 도쿄도 등을 포함한 미나미칸토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해구형 지진입니다.지진의 진동은 본진이 시작될 때부터 완전히 멈출때까지 4분에서 최대 10부까지 걸린 오래 지속된 지진으로 이 지진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 및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인 간토 대학살 등을 통틀어 간토 대지진이라 합니다.이 지진으로 인해 간토 지방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흉흉해진 민심 덕분에 일반인들 사이에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싹트는 가운데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 각 지역의 경찰서에 지역의 치안 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합니다.그런데 이때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 중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있으니 주의라하는 내용이 있었고,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보도되었고 보도 내용에 의해 더욱더 내용이 과격해진 유언비어들이 신문에 다시 실림으로써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있다는 헛소문이 각지에 돌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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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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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업적으로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효종은 조선의 역법이 서양에 비해 뒤떨어지는 점을 알고 태음력을 구법에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해 24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각을 계산해 제작했으며, 백성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호서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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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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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과 고조선에 대해서 설명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조선은 단군왕검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한반도 최초의 고대 국가입니다.본래 국호는 조선이나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고조선으로 합니다.역사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고조선이 청동기 문명을 기반으로 한 현 중국 랴오닝성 및 북한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에 있던 고대 국가로 파악합니다.8조법이라는 법률이 정해져있었는데 이 법은 권력층의 사회질서 유지 수단이며 가부장 중심의 계급사회로서 사유재산을 중히 여겼고 응보주의에 따른 형법을 지녔던 당시 사회상을 반영합니다.당시 고조선 사회는 이미 상당한 정도로 계급 분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8조의 법금 중 현재 전해지는 3개 조항에서 화폐 개념과 노비의 존재, 사유재산에 대한 보호 조치를 볼수 있으며 이 시기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화려한 부장품들은 계급 분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그러나 촌락에선 공동체적 관게가 여전히 작용했습니다.이 시기의 사회 계층은 귀족, 촌락의 일반민, 노비로 나뉘며 귀족은 노예와 토지, 재화 등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따로 가지면서 촌락 공동체를 대표하는 수장의 면모도 함께 가졌고, 노비는 상당수 존재했으나 많은 수의 노비를 사역하는 대규모 노예경영은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노예제 경영이 발달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화폐 경제의 발달, 도시의 번창과 같은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당시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산 활동을 담당한 이들은 촌락의 일반민으로 이들은 당시 농업이 지닌 낮은 생산력과 가뭄이나 홍수 등에 따른 생산의 불안정성 및 철제 농기구의 부족 등으로 인해 소농단위의 자립성을 유지할수 없었으며 촌락 단위로 상호 의존하여 생산과 소비생활을 하는 공동체적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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