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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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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9일 작성 됨
Q.
만학도 란 말의 어원은 어디서 발생한건가요?
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만학'晩學'이라는 것은 한자로 말 그대로 '늦은 나이에 공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특별히 '만학도'라고 부르게 된 어원같은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역사
2024년 7월 19일 작성 됨
Q.
개혁군주 공민왕의 업적은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공민왕은 원나라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여러 개혁을 펼친 군주입니다.그는 원나라의 풍습과 연호 및 관제를 폐지시켰습니다.당시는 몽골풍의 관제와 풍습이 민간에까지 유행하고 있어서 그 폐해가 심각했기 때문입니다.공민왕은 문종 때의 옛 제도로 복구시키고 원나라가 설치해놓은 고려 정권 장악을 위한 정동행성과 쌍성총관부를 철폐하습니다. 또한 기철을 비롯한 친원파를 제거하고,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을 공략했다고 합니다.
역사
2024년 7월 19일 작성 됨
Q.
우리나라 역사상 회를 먹었다는 기록은 언제부터 먹기 시작 했는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유몽인이 지은 '어유야담'에 의하면 임진왜란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선회를 먹는 것을 보고 명나라 병사들이 어떻게 그런 것을 먹느냐고 비아냥댔다고 합니다. 이에 선비중 한명이 공자께서도 '회를 즐겨 드셨는데 무엇이 문제냐.'라고 반박을 하자 명나라 군사들이 아무말도 못했다고 합니다.이를 볼 때 단순히 기록상으로도 조선시대부터 회를 즐겼던 것은 확실하며 공자와 비슷한 시기에 회를 먹었다고 하면 이천년전까지 회문화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추측됩니다.
역사
2024년 7월 18일 작성 됨
Q.
수나라는 살수대첩으로 고구려 때문에 멸망하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네. 맞습니다.수양제는 크게 전쟁에서 패배를 하고도 그 원한으로 또 다시 무리해서 병력을 모으고 병선을 건조하여 고구려를 침략할 준비를 하다가 양현감의 반란을 시작으로 내부가 분열하여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역사
2024년 7월 18일 작성 됨
Q.
회광반조의 유래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회광반조라는 말은 원래 불교 선종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내 밖을 비추던 불빛을 내 안으로 돌려 스스로를 살핀다는 뜻으로 끊임없는 자기 반성을 통해 자신에게 내재된 영성을 되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일상에서는 사람이 죽기 직전에 잠시 원기를 되찾는 상태를 비유하기도 합니다.
역사
2024년 7월 18일 작성 됨
Q.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정해진건가요?
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한국이라는 국호는 마한 · 변한 · 진한, 즉 삼한의 종족 명칭 또는 부족연맹체의 명칭에서 유래합니다.1897년 청나라로부터 독립국임을 표방하기 위해 고종이 황제를 칭했을 때,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했습니다. 이를 계승하여 1919년 중국 상해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였습니다.
역사
2024년 7월 18일 작성 됨
Q.
죽창은 옛날에 진짜 쓰였다는 무기라는데?
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죽창은 오랜 과거부터 무기로 쓰였습니다.이는 대나무의 특성의 기인한 것인데요.대나무는 기후만 맞으면 지력이 별로 없더라도 단시일내에 쑥쑥 자라는 식물입니다. 그리고 꽤 튼튼하여 끝부분을 날카롭게 하면 충분히 무기로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철제창에 비해서는 내구도가 약하지만 민병등이 급하게 무장을 해야할때는 이만한 무기도 없었습니다.죽창이 우리나라에서 유명해진 것은 조선시대 민란등에서 민초들이 무장을 할 때 무기로 죽창을 자주 활용함으로써 기득권에 대한 저항의 상징처럼 쓰이게 되었습니다.
역사
2024년 7월 18일 작성 됨
Q.
옛날 고구려 신라 백제 시대에도 지금과 같은 말투를 했을까요?
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삼국시대에도 지금과 같이 지역에 따라서 사투리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다만 지금보다 더 폐쇠적이고 이동, 거주등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의사소통등은 지금보다 더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사서를 보면 삼국의 인물간에 통역없이 대화를 했던 것을 알 수 있으나 공식문서나 대화는 한자를 이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역사
2024년 7월 18일 작성 됨
Q.
을지문덕이나 연개소문 등 자손들은 어디에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을지문덕과 연개소문 장군의 후손들은 고구려의 멸망으로 인해 그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다만 평양시 대평역 근방에 을지묘라고 전해 오는 큰 고분이 있는 이 인근에 돈뫼(頓山)라 하는 동네가 있고 이 곳에 을지문덕 장군의 후손들이라는 돈씨 집안 30~40호 가량이 있어 이 일대가 돈산군(頓山君)의 봉토로 여겨지고 있다고 합니다.연개소문의 장군의 후손들에 대한 단서는 고구려를 배신하고 당나라에 귀부한 연남생으로부터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당에서 사망한 그의 묘지명을 보면 '연남생'이 아닌 '천남생'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 '연'씨는 당나라 태종 "이연"과 휘가 같아 당나라에서는 "연"씨를 "천泉"씨로 불렀습니다. 따라서 연개소문의 후예는 한국이 아닌 중국에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역사
2024년 7월 18일 작성 됨
Q.
중세시대에는 철제갑옷을 입고 어떻게 배변활동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유럽 중세기세 갑옷을 보면 전신을 철제로 둘렀기 때문에 화장실을 어떻게 이용했을까 의문이 들곤합니다. 하지만사타구니와 엉덩이 부분은 판금등으로 두르지 않고 옷위에 상의로부터 내려오는 사슬갑옷등으로 가렸다고 합니다.사실 그곳까지 갑옷을 덧대었으면 허벅지등에 갑옷끼리 부딪혀 움직이기 힘들었을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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