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불교문화 에서 내려져 오는 삼보 사찰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불보, 법보, 승보의 세가지 보물을 지니고 있는 사찰을 삼보사찰이라고 합니다. 불보는 석가모니, 즉 부처님을 뜻하는데 부처의 가사 한벌을 모신 즉 부처의 법신을 상징하는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가 해당됩니다.법보는 부처님이 스스로 깨달은 진리를 중생을 위해 설법한 교법으로, 합천 해인사에 팔만대장경과 대장경판이 있어 법보사찰이라고 부릅니다.마지막으로 승보는 교법을 배우고 수행하는 사제집단을 뜻하는데 부처님과 함께 진리에 이르는 벗이란 뜻입니다. 지눌의 정혜결사의 도량이자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송광사가 승보사찰에 해당합니다.이렇게 불, 법, 승보 세가지 보물을 모신 사찰을 삼보사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Q.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진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종의 정실부인이자 나중에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하며 사후 황후 칭호를 받은 명성황후는 민씨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시아버지이며, 안동 김씨 등 세도가와 관련이 없고 외척으로서 세력이 없는 민씨가 고종의 비로 선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대원군 집권시기에는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며 대원군이 물러난 후 정치세력으로 민씨 집단이 등장합니다.민씨세력은 대원군대 쇄국정책을 철회하고 개화정책 즉 서양근대문물 수용으로 정책을 선회하게 됩니다. 일본의 운요호 사건 등 무력충돌이 있었지만, 이런 흐름 속에서 최초의 근대적 조약, 강화도 조약이 1876년 맺어집니다. 임오군란은 이런 개화정책에 대한 반발로 일시적으로 대원군이 집권하지만 청군이 민비를 지원하고 구원하여, 대원군을 청으로 압송하며 다시 복귀합니다.동학농민운동의 실패와 청일전젱에서 일본의 승리로 일본의 영향력이 과도하게 커지는 상황에서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도움으로 일본을 견제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일본 낭인집단이 궁에 들어와 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되고,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하고 이듬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광무개혁을 진행하고 자주독립국가를 이루러 노력하나, 러일전쟁 승리 후 일본의 식민지로 가는 수순을 밟게 됩니다.조선의 국모로서 개화정책을 추진하고 또 외교적 탈출구를 모색하는 등 과거 전통적인 왕비와는 다르게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는 펑가를 내릴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