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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11.21

명나라의 원숭환 장군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명나라 후기의 장군이었던 원숭환이 지략, 전략이 뛰어나 후금을 여러차례 막아낸걸로 알고 있습니다.

원숭환이라는 인물의 생애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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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 입니다.

    ✅️ 원숭환은 명나라 말기의 명장으로 여러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던 후금의 누르하치(후의 태조 천명제)를 패퇴시켜 죽게 만든 장군으로, 사실상 홍이포를 통해 후금군을 저지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명 숭정제의 의심을 사게 되고, 책형이라는 형벌로 인해 죽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자(字)는 원소(元素)이고, 호(號)는 자여(自如)입니다. 태어난 곳은 광동성입니다. 1597년(萬曆 25년) 수재(秀才)가 되었고, 1606년(萬曆 34년)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습니다. 1619년(萬曆 47년) 과거(科擧)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푸젠성[福建省] 샤오우[邵武]의 지현(知縣)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젊어서부터 변방의 정세를 묻는 등 군사(軍事)에 관심이 많았고, 성격이 담대하고 지략이 많았으며 문관(文官) 출신이면서도 사람들과 군사 전략을 논하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1626년(天啓 6년), 누르하치(努爾哈赤, 청 太祖 1559~1626)가 랴오허[遼河]를 건너 영원성(寧遠城)을 공격해 왔을때, 원숭환은 우월한 화력을 바탕으로 후금(後金)의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후금(後金)에게 계속 패전(敗戰)만 거듭해 오던 명나라는 원숭환으로 인해 비로소 승리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를 ‘영원대첩(寧遠大捷)’이라고 하며, 그 공으로 원숭환은 병부시랑(兵部侍郎) 겸 요동순무(遼東巡撫)로 승진하였습니다. 1627년(天啟 7년)에는 영원성(寧遠城)과 금주성(錦州城)에서 후금(後金)의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 1592~1643]의 공격 마저 물리쳤는데, 이는 ‘영금대첩(寧錦大捷)’이라고 부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자는 원소, 호는 자여 입니다. 광둥성 동완현에서 태어났으며 원적지는 광시성 오주등현입니다. 1597년 수재가 되었고 1606년 향시에 합격하여 거인이 됩니다. 1619년 과거 합격, 진사가 되었고 푸젠성 샤오우의 지현으로 임명, 젊어서부터 퇴직한 병사들에게 변방의 정세를 묻는 등 군사에 관심이 많았고 성격이 담대하고 지략이 많았으며 문관 출신이면서도 사람들과 군사 전략을 논하기를 즐겼습니다.

    1622년 어사 후순에게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병부의 직방사 주사가 되며, 당시 명은 왕화정이 이끄는 군대가 후금에 크게 패해 만주의 지배권을 후금에 완전히 빼앗겼고 후금은 랴오양과 광닝을 점령하고 산하이관을 넘보고있어 베이징도 위기감에 휩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숭환은 홀로 요동 지역을 정찰하고 돌아와 스스로 산하이관 방위를 지원, 그는 병비검사로 임명되어 산하이관으로 파견되었습니다.

    당시 명군은 산하이관의 방어에만 모든 힘을 기울였으나 원숭환은 산하이관 북쪽에 성을 쌓아야 효과적으로 방어할수 있다고 보고 영원성 을 개축할 것을 조정에 건의 , 1623년 ~1624년 까지 영원성을 10m의 높으로 새로 쌓았고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구입해 홍이포라고 불리는 최신식 대포를 배치했습니다.

    1626년 누르하치가 랴오허를 건너 영원성을 공격해 왔으나 원숭환은 우월한 화력을 바탕으로 후금의 군대를 물리쳤고 명은 1618년 이후 후금에게 계속 패전만 거듭해 왔는데 원숭환이 비로소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 전투를 영원대첩이라고 하며 그 공으로 원숭환은 병부시랑 겸 요동순무로 승진, 1627년 영원성과 금주성에서 후금의 태종 홍타이지의 공격도 물리쳤는데 이는 영금대첩이라 합니다.

    그러나 당시 명은 희종의 총애를 받ㅇ느 환관 위충현이 전횡을 휘두르고 있었으며 환관들의 엄당과 청의파 관료들의 동림당 사이에 당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고 원숭환은 위충현의 모함을 받자 병을 내세워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628년 사종이 즉위하자 다시 병부상서이자 우부도어사로 기용되었습니다.

    원숭환은 사종에게 5년 안에 요동을 회복하겠다는 계획을 내세웠고 사종은 그에게 상방보검을 주었습니다.

    황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원숭환은 1629년 조선의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을 처형하고 서부주 등을 파견하여 가도를 요동 수복의 전진기지로 삼았고 모문룡은 1622년 가도로 들어가 동강진을 건설하나 후금과의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채 밀수 등을 일삼으며 독자세력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당의 비호를 받던 모문룡을 황제의 재가도 없이 처형해 원숭환은 엄당의 공격을 받게 되며 1629년 10월 후금의 홍타이지는 원숭환이 지키고 있는 영원성과 산하이관을 피해 몽골 지역으로 우회하여 장성 동북쪽의 시펑커우를 거쳐 베이징을 공격, 영원성에 주둔하던 원숭환은 급히 베이징으로 병사를 이끌고 이동해 광거문과 좌안문 부근에서 후금 군대를 물리쳤고 후금은 베이징 외곽의 남해자로 병력을 물리고 사종에게 화친을 맺자 요구, 주변 지역의 약탈에 나서는 한편 환관을 매수해 원숭환이 후금과 내통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말을 퍼뜨립니다.

    결국 1629년 12월 사종은 원숭환을 모반 혐의로 감옥에 가두고, 동림당 계열의 관료들이 적이 성 아래까지 와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장성을 허물수 없다며 원숭환의 구명을 호소했으나 엄당 계열의 온체인 등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며 처형을 촉구, 결국 원숭환은 1630년 9월 22일 베이징의 서시 거리에서 온몸을 잘라내어 죽이는 능지형을 당했으며 그의 시신은 광거문의 광동의원에 묻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