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기를 집필한 사마천에게 한 무제가 궁형을 가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인가요
사마천에 사기는 중국 고대사에 대한 중요한 역사 서적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러한 훌륭한 업적을 해낸 사마천에게 왜 한 무제는 궁형이라는 형벌을 내렸는지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원전 99년 무제의 명으로 흉노를 정벌하러 떠났던 장군 이릉이 패하여 포로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보고받은 무제는 진노하여, 이릉의 처분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중신 회의 열었다. 신하 모두 이릉을 비난하고는 이릉의 가족 모두 능지 처참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사마천은 이릉의 충절과 용맹을 찬양하고 두둔했기에 이릉을 질투한 이광리의 모함을 받아서 무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사마천은 태사령의 직책에서 파면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사마천은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 사형을 면하는 것은 두 가지 방법, 즉, 어마어마한 벌금을 내거나 궁형을 받는 것 둘뿐이었다. 이 벌금의 액수라는 것이 당시 기준으로 50만 전이었는데 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서 정병 5천 명을 1년 동안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 총합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이 때문에 사마천이 태사령이라는 직책으로 받는 녹봉으로 이 벌금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궁형을 받느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회 풍조였으나, 사마천은 《사기》의 완성을 위해 궁형을 받아들였다(궁형으로 인하여 고환이 제거되어 그의 초상화에는 수염이 없다). 궁형으로 죽음을 모면한 사마천은 아버지의 대부터 편찬중이었던 역사서 《사기》의 편찬을 완료하였다.
사실 이는 한 무제가 객관적인 평가를 한 게 아니라 이광리가 이릉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인데 이광리의 여동생이 한 무제의 후궁이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태사공서를 집필 하던 중 사마천은 보병 5천으로 분전하다가 흉노족 8만에게 포위당해 장군 이릉을 변호했고 이로 인해 한무제의 노여움을 샀습니다.
사마천은 이릉을 선전했지만 상황의 여의치 못해 모두의 목숨을 보전하고자 항복한 것이라 변호했습니다.
패전의 책임은 대장군인 이광리가 져야 했으나 이광리의 누이가 무제의 애첩이었기 때문에 이릉에 대한 변호는 무제 자신에 대한 비찬이라 여겨진 것으로, 이에 무제의 미움을 사 옥에 갇히게 되었고, 무제는 옥에 갇힌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이때 사마천이 택ㅎ라 수 있는 길은 돈 50만전을 내고 서민으로 풀려나기, 사형, 궁형 중 하나로 , 당시 50만전은 병력 5천을 1년동안 유지할수 있는 정도로 거금이었는데 거부나 권세가가 아니었던 사마천이 이를 감당할수 없었고 결국 선친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궁형을 받고 성불구자가 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38세 무렵인 기원전 108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만에 대를 이어 사관이 됨으로써 역사서를 편찬하는 일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사마천은 사관 집안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아버지가 남긴 유언, 즉 역사서 완성을 필생의 사명으로 물려받았다.
사마담은 생전에 역사서 저술에 뜻을 두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그 과업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사마담은 천문과 역학은 물론 도가(道家)까지 섭렵한 뛰어난 학자였고, 사마천은 그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음양가, 유가, 묵가, 명가, 법가, 도가 등 6대 학파의 특징과 득실을 논평한 <논육가요지(論六家要指)>는 사마담이 남긴 훌륭한 논문으로 사마천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는 한나라의 전성기이자 중국 역사상 몇 되지 않는 전성기였다.
40대에 접어든 사마천은 조정의 일과 『사기』 저술이란 두 과업을 해내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친구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 자신의 생활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대야를 머리에 인 채 하늘을 볼(대분망천(戴盆望天)) 수 없기에 빈객과의 사귐도 끊고 집안일도 돌보지 않고 밤낮없이 미미한 재능이나마 오로지 한마음으로 직무에 최선을 다해 주상의 눈에 들고자 했습니다.
태사령에 임명된 지 10년째이자 47세가 되던 BC.99년, 사마천은 인생에 중대한 전환이 되는 사건을 겪게 된다. ‘이릉(李陵) 변호 사건’ 또는 ‘이릉의 화’라 불리는 사건이다.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던 명장 이광의 손자로서 흉노를 토벌하여 빛나는 공을 세웠던 장수 이릉이 전쟁터에서 어쩔 수 없이 흉노에 항복하는 일이 벌어졌다.
얼마 전까지 이릉의 승리에 환호하던 조정 대신들은 하루아침에 일제히 이릉을 성토하고 나섰다. 패배를 책임질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답답했던 무제는 사마천에게 의견을 물었다. 사마천은 황제의 심기를 풀어주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밝히며 이릉을 변호했다. 그러나 사마천의 진심과 변호는 무제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사마천이 이릉을 변호하기 위해 언급한 작전상의 실수가 궁극적으로 대장군 이광리를 지목한 것 아니냐는 오해를 샀기 때문이다. 대장군 이광리는 무제의 처남이었던 것이다.
분노한 무제는 사마천을 옥에 가두었다. 사마천은 이릉과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다만 이릉이 전쟁에서 승리할 때는 칭찬을 아끼지 않다가 흉노의 포로가 되자마자 무제와 실권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릉을 비난하는 조정 대신들의 행태가 못마땅했는데, 마침 황제의 하문이 있어서 이릉을 변호했던 것이다.
상황은 더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릉이 흉노에서 벼슬까지 받고 흉노 군대에 병법을 가르친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에 무제는 이릉의 가족을 몰살한 다음, 역적을 옹호했다는 죄목으로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이자 필생의 사업인 『사기』 저술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상황에서 이런 일을 맞이하고 보니 어쩔 줄 몰랐다.
그는 이대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지, 목숨을 부지할 방법은 없는지를 고민했다.
당시 한나라 법에 따르면 사형수가 죽음을 면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50만 전이라는 거금을 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궁형을 자청하는 것이다.
사마천에게는 50만 전이 거금이었지만 부자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사마천을 변호하지 않는 상황에서 돈까지 지불하며 그를 구할 사람은 없었다.
사마천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었기에 결국 그는 치욕을 감수하며 궁형을 자청했다. 그의 나이 49세 때의 일이다. 이듬해 사마천은 사면을 받아 감옥에서 풀려났다.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사형보다 치욕적인 형벌을 자청한 그는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모진 치욕을 당하기로는 궁형보다 더한 것이 없소이다. ······ 내가 화를 누르고 울분을 삼키며 옥에 갇힌 까닭은 차마 다하지 못한 말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였소.”
사마천은 “이것은 나의 죄로다, 이것은 나의 죄로다! 아무 쓸모없는 불구의 몸이 되었구나.”라고 자책했다. 마음이 울분으로 가득 차서 미친 사람처럼 곳곳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치욕과 울분도 『사기』의 완성을 막지 못했다. 그는 곧 마음을 다잡고 남은 힘을 『사기』에 쏟았다.
출처 : 중국인물사전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노인옥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마천은 중국 전한 시대의 유명한 역사가로 '사기'라는 역사서를 저술하였습니다.
그는 기원전 99년에 흉노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릉 장군을 변호하였으나, 이릉 장군이 한 무제의 처남인 이광리와 적대 관계였기 때문에 한 무제의 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사마천은 이때문에 옥에 갇히고, 사형을 면하기 위해 궁형이라는 치욕적인 형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궁형은 남자의 생식기를 자르는 형벌로, 사마천은 이 때문에 자손을 낳을 수 없게 되었다네요.
사마천은 궁형을 받은 후에도 '사기'의 편찬을 계속하였고, 그래서 그를 중국 '역사의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제 답변이 도움이 되셨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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