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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비둘기23.07.16

조선시대에는 전체 인구조사를 어떤방식으로 하였나요?

지금에는 전체인구를 파악하는데 기계의 힘을 빌려서 정확하게. 파악이 가능한데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현대적장비도 없고 기록물도 없었던것으로 아는데요


조선시대에는 전체 인구조사를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였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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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16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런데 기록상으로 볼 때 우리나라에서 전국토에 걸치는 총 인구통계는 조선시대인 1395년( 태조 4) 이후의 것이 있으므로 이때부터 기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이전의 시대에 관해서는 호구조사나 호적제도에 관한 기록을 통하여 각 시대의 사정을 엿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각 고을의 수령들이 호구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호적자료는 실제 인구의 증감을 반영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우선 조선시대에는 연령에 따라 노(老), 장(壯), 약(弱), 아(兒)로 구분했는데, 10세 미만의 아동들은 호적에 올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만큼 유아 사망율이 높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왕조가 호구조사를 현대국가의 인구통계처럼 정책수립의 기본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수령들은 고과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심한 흉년이나 전염병으로 인구가 대폭 감소했다 하더라도 과거의 관례대로 일정한 수의 호구를 중앙에 보고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반대로 경제사정이 좋아져서 인구가 대폭 증가했다고 해도 역시 과거의 호구에 비해 아주 작은 증가분만을 기록하여 보고할 뿐이었습니다. 이를 실제로 보고하면 자신의 고을에 할당되는 부세량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호구통계는 실제 인구수를 반영하는 통계로서의 신뢰성은 그다지 크지 않았습니다. 최근 한 연구에 따르면 조선시대 호구통계의 완전성은 40%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오가작통법은 조선시대 다섯집을 1통으로 묶은 호적의 보조조직입니다.

    조선 최초의 오가작통법은 단종 연간에 시행되었던 것으로 추정, 1485년 한명회의 발의에 따라 채택되어 경국대전에 올랐는데 이에 의하면 한성부에서는 방 밑에 5가작통의 조직을 두어 다섯집을 1통으로 하여 통주를 두고 방에 관령을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