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조선시대에는 어떤 방식으로 무역을 했을까요?
요즘엔 컨테이너선도 있고 각종 허브공항이 있어 각 나라별 무역이 활발하잖아요. 그런데 예전 조선시대에는 물론 청나라와 무역을 많이 했겠지만 어떤 방식으로 무역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치호 관세사입니다.
청나라와의 무역은 주로 조공무역이나 사무역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조공무역은 중국이 주변 국가들에게 공물을 요구하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하사품을 제공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반면에 사무역은 양국 간의 자유로운 거래로 이루어졌습니다. 조선시대 청나라와의 무역은 주로 의주에 본거지를 둔 의주 만상이 주도했습니다.
의주 만상은 개성 상인들에게 인삼을 받아 중국 연경(북경)에서 팔고 그 돈으로 비단을 사오는 방법으로 이익을 취했으며, 비단 외에도 중국 서적, 자기, 약재, 문방구 등도 의주 만상의 주요 수입 물품이었습니다.
청나라와의 무역은 당시의 청나라 수도인 심양(瀋陽)에 왕래하였으며, 이후 의주(義州)에서 압록강을 건너 책문(柵門)·봉황성(鳳凰城)·요양(遼陽)·우가장(牛家莊)·광녕(廣寧)·영원위(寧遠衛)·산해관(山海關)을 거쳐 연경(燕京)으로 가는 경로를 이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전경훈 관세사입니다.
조선시대의 대외무역은 크게 중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중국과의 무역은 명나라와 청나라를 거치며 공무역과 사무역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공무역은 조선 정부가 사절을 파견하여 중국에 보내는 세공을 바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세공품은 저마직물, 화문석, 호피, 나전소함, 황모필, 인삼, 말 등이었습니다. 중국은 이에 대한 답례로 견직물, 귀금속, 약재, 서적 등을 보내주었습니다.
사무역은 사절단을 따라가는 상인들이 개인적으로 이루어내는 무역입니다. 팔포라는 인삼이나 은을 가지고 가서 무역을 하였는데, 그 양이 제한되어 있었으나 점차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일본과의 무역은 공무역과 사무역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공무역은 조선 정부와 일본의 대마도주가 주고받는 국신물 교환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조선은 면포, 인삼, 대장경, 미곡 등을 수출하고, 일본은 동, 유황, 소목, 후추, 금, 은 등을 수입하였습니다.
사무역은 일본 상인들이 조선의 왜관을 통해 이루어내는 무역입니다. 왜관은 일본 상인들의 숙박소 및 상거래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공·사 무역을 모두 이곳에서 행하도록 했습니다.
이 밖에도 조선은 유구, 샴, 자바 등과도 공무역을 하였으나, 그 규모는 미미했습니다.
조선시대의 대외무역은 조선 정부가 주도하는 공무역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공무역은 조선의 외교와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사무역의 비중이 점차 늘어나면서 조선의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왕희성 관세사입니다.
잘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조선시대의 대외무역은 명나라와 청나라 등 중국과의 무역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대명무역은 사절을 통한 공무역과 사절 일행의 사무역 등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사무역은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절 일행은 정사·부사·역관·호공관(護貢官) 등을 비롯하여 각종 수행원까지 합하면 보통 300∼600인에 달하였으며, 이들은 육로 또는 해로를 이용하여 북경(北京)에 도착하였습니다.
대일무역도 사절을 통한 국신물 교환형태의 공무역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조선 전기는 일본 정부가 직접 사절을 파견하기도 하였으나 후기부터는 주로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일본국을 대표하여 세견선(歲遣船)을 보내옴으로써 양국간의 공무역이 이루어졌다는 점 참고 부탁드리겠습니다.
도움이 되셨기를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17세기 중엽부터 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공적으로 허용된 무역인 개시와 사적인 무역인 후시가 이루어졌고 청에서 수입하는 물품은 비단, 약재, 문방구 등이었고, 수출하는 물품은 은, 종이, 무명, 인삼 등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중국과의 해상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 상, 해운이 주를 이루었고, 상해(上海)와 같은 중국의 핵심 항구와의 무역이 중요했습니다.
무역은 주로 정부가 인정한 통행로를 통해 이루어졌고, 이를 위해 통행세가 부과되었습니다. 또한 국경 간에는 관세가 부과되어 통과하는 무역상품에 대한 세금이 걷혔다고 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현 관세사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서 조선시대 무역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대외무역은 명나라와 청나라 등 중국과의 무역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대명무역은 사절을 통한 공무역과 사절 일행의 사무역 등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사무역은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건국 초 명나라측이 재정상의 이유 등으로 3년1사를 고집하였으나, 조선측은 사대외교 및 선진문물의 도입이라는 입장에서 1년3사를 요청하였다. 결국, 정종 때에 이르러 1년3사의 요청이 관철되어 그 뒤 사절의 파견이 빈번하여졌다.
사절의 종류는 동지사(冬至使)·정조사(正朝使)·절일사(節日使)·천추사(千秋使)·성절사(聖節使)·사은사(謝恩使)·주청사(奏請使)·진하사(進賀使)·문안사(問安使) 등 다양하였다.
이들 사절단을 통한 대명 공무역은 저마직물류·화문석류·호피류·나전소함·황모필·인삼·말 등 10여 종을 수출하고, 견직물류·귀금속류·약재류·서적류·문방구류 등을 수입했다.
대청무역도 사절을 통한 공무역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다. 처음은 명대의 전례에 따라 매년 성절·정조·동지·천추 등 4종의 정기사절과 특수한 경우 수시로 사절을 파견하였으나, 1644년(인조 22)부터는 4종의 정기사절을 통합하여 삼절 겸 연공사(三節兼年貢使)라는 이름으로 정조(正朝:새해 아침)에 보내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사절 일행은 정사·부사·역관·호공관(護貢官) 등을 비롯하여 각종 수행원까지 합하면 보통 300∼600인에 달하였으며, 이들 사절 일행은 육로 또는 해로를 이용하여 북경(北京)에 이르렀다.
대청 공무역품은 품목과 수량이 대체로 일정하였으나 사정에 따라 변동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청관계가 정상화된 영조 때의 사례를 보면 찹쌀 40포, 세포(細布:곱고 가늘게 짠 삼베) 3,000필, 명주 400필, 흰 모시 200필, 각종 화문석 20령(領), 종이 2,000권, 수달피 300장, 녹비 100장 등을 세공으로 바쳤고, 이에 대한 청나라의 답례품은 고급주단·초피(貂皮:담비 종류의 모피의 총칭)·견·방사·은·약재·서적 등이었다.
대청무역은 이 밖에도 사절 일행에게 공인된 사무역이 있었는데, 이는 주로 팔포(八包:중국으로 보내는 사신에게 노자가 무역 자금으로 가져갈 수 있게 허용한 일정한 양의 인삼 또는 은)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이에 대해서는 엄격한 양의 제한이 있었으나, 뒤에 그것이 해이해져서 그 무역량은 적지 않게 되었다.
한편, 17세기 이후 국경지대의 호시무역이 국가관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압록강 안의 중강호시는 1646년에 개설되었는데, 처음은 엄격한 국가관리 아래 그 무역품과 수량 등이 법으로 정해져 있었으나, 점차로 그러한 제약이 해이해져서 그 뒤 중강후시(中江後市:中江에서 행하던 개인 밀무역 시장)라는 사무역이 번성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1700년(숙종 26)에 이르러 이를 폐지하였으나, 그 대신 책문후시(柵門後市:청나라와의 밀무역 시장)가 성황을 이루게 되어, 여기에서는 조선의 금·인삼·종이·우피·저포 등과 청나라의 비단·당목(唐木:되게 드린 무명실로 폭이 넓고 바닥을 곱게 짠 피륙)·약재·보석·서적 등이 교역되었다.
두만강 안의 회령호시(會寧互市)와 경원호시(慶源互市)는 1628년(인조 6) 및 1646년에 각각 개설되어 연간 1, 2회 정도로 개시되었는데, 이들 호시도 처음은 엄격한 국가관리 아래 그 무역품과 수량이 정해졌지만, 뒤에 이러한 제약은 해이해지고 사무역이 번성하였다.
대일무역도 사절을 통한 국신물 교환형태의 공무역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다. 조선 전기는 일본 정부가 직접 사절을 파견하기도 하였으나 후기부터는 주로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일본국을 대표하여 세견선(歲遣船)을 보내옴으로써 양국간의 공무역이 이루어졌다. 이때의 대일 수출품은 면포·인삼·대장경·미곡 등이었고 수입품은 동·유황·소목·후추·금·은 등이었다.
한편, 조선 정부는 무질서하게 건너 오는 일본인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일본인의 무역항을 지정하기도 하였다. 태종 초에 이르러 부산포와 내이포를 일본인 전용 무역항으로 지정하였고, 1426년(세종 8) 염포를 추가 지정하기도 하였으나, 1510년(중종 5)에 이르러 삼포왜란이 발발하자 내이포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폐지하였다.
그 뒤 일본인의 끈질긴 요청으로 다시 부산포를 추가하였으나, 그 뒤에도 가끔 일본인들의 난동이 있어 결국 부산포 1개항만을 남기고 내이포도 폐지하였다. 그리고 대일무역의 통제를 한층 더 강화하기 위하여 지정 무역항에는 왜관을 설치하고, 이를 일본 상인의 숙박소 및 상거래 장소로 삼아 공·사 무역을 모두 이곳에서 행하도록 조처하였다.
이 밖에도 조선시대는 유구(琉球:지금의 대만 또는 류쿠)를 비롯하여 남만제국(南蠻諸國), 즉 샴(타이) 및 자바 등과 입공형식의 공무역을 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보잘것이 없었다.
답변이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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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까지의 무역은 대부분 사무역보다는 공무역이 성행하였다고 합니다.
아래의 내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대외무역은 주로 국가간의 국신물 교환형태(國信物交換形態), 즉 국가 관리의 공무역(公貿易)이 우리 나라 대외무역의 지배적인 형태였다고 볼 수 있다.
대청 공무역품은 품목과 수량이 대체로 일정하였으나 사정에 따라 변동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청관계가 정상화된 영조 때의 사례를 보면 찹쌀 40포, 세포(細布:곱고 가늘게 짠 삼베) 3,000필, 명주 400필, 흰 모시 200필, 각종 화문석 20령(領), 종이 2,000권, 수달피 300장, 녹비 100장 등을 세공으로 바쳤고, 이에 대한 청나라의 답례품은 고급주단·초피(貂皮:담비 종류의 모피의 총칭)·견·방사·은·약재·서적 등이었다.
감사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무역분야 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의 대외 무역은 크게 사행무역, 공무역, 사무역, 밀무역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사행무역은 조선의 사신단이 중국을 방문할 때 진상품과 함께 조선의 물품을 가지고 가서 중국 상인과 거래하는 방식입니다. 사행무역은 국가간의 외교적 교류를 위한 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상당한 양의 무역이 이루어 졌고, 공무역은 조선 정부가 직접 중국과 일본에 공무를 맡아서 가는 관리들을 통해 물품을 교역하는 방식으로 공무역은 사행무역과 마찬가지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무역이었지만, 사행무역보다는 규모가 작았습니다. 또한, 사무역은 조선의 상인들이 중국이나 일본에 직접 가서 물품을 교역하는 것이며, 사무역은 조선 정부가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었지만, 밀무역으로 이루어지면서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밀무역은 조선 정부의 허가 없이 조선의 상인들이 중국이나 일본에 가서 물품을 거래하는 것으로 국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국가의 재정 손실과 왜구의 침입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조선 정부는 이를 엄격하게 금지했습니다.
조선시대의 무역은 주로 바닷길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조선은 서해안과 남해안에 여러 개의 포구를 설치하고, 그곳을 통해 중국과 일본과의 무역을 관리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진솔 관세사입니다.
예전에는 대부분 육로나 배편으로 무역을 진행하였으며, 이중에서 안정성을 위하여 육로로 상당부분 진행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의 끝단인 신의주 그리고 북쪽의 대도시인 개성을 거점으로 상업이 발달하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는 대부분 공무역을 통하여 무역이 되었고 사무역이 어려웠습니다만 후기로 갈수록 자유롭게 무역이 진행되면서 부유한 중인 계층이 성장하게된 점 참고부탁드립니다.
답변이 도움되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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