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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런한오소니23
가지런한오소니2323.01.08

판문점 도끼 사건이 왜 일어난 건가요?

1900년대에 판문점 도끼 사건 이후로 남북관계가 악화가 되었는데 판문점 도끼 사건은 왜 일어난 건가요?

판문점 도끼 만행 이후에 우리나라와 북한의 외교관계는 어떻게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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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일대

    에 서로의 초소를 가리는 미루나무를

    미군이 자르려고 하다가 북한군에

    의해 도끼로 살해된 사건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 45분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유엔군 측 제3초소 앞에서 미군장교 2명과 사병 4명, 한국군 장교1명, 사병4명으로 이루어진 11명의 장병은 한국인 노무자들의 미루나무 가지치기 절단 작업을 호위하였는데, 이때 북한국 장교 2명과 수십명의 사병이 나타나 가지치기 작업을 중단할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UN측이 이를 무시하고 계속 작업을 진행시키자, 자동차로 증원 된 북한군 30여명은 미리 준비한 도끼와 쇠망치를 휘둘러 2명의 미군장교를 죽였습니다.

    이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한미 양국이 합동작전으로 보복해야 한다는 뜻을 스틸웰 당시 사령관에게 전달하고 유병현 당시 합참본부장이 스틸웰 사령관과 협의 끝에 정전위원회를 소집하여 항의하며 강력한 경고를 하고 도발행위가 공동경비구역안에서 일어났으므로 그 안에서 예방한 경고를 실절적인 행동으로 보이며, 발생의 책임을 북측에 추궁하면서 범인 인도나 처벌을 요구하고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군사적 행동을 취하며 국지적인 전투도 불사한다는 내용을 담은 대응책 초안을 잠정적으로 마련했습니다.

    한미 양국은 8월19일부터 이 같은 연합 대응책의 초안에 따른 단계적인 절차를 밟았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8월19일 제3가관학교 졸업식 훈시를 통해 북한이 재도발해 올 경우 즉각 응징할것을 밝혔습니다.

    유엔군은 박대통령과한국군 수뇌부와 협의 끝에 문제가 된 미루나무를 8월 21일 오전 7시에 잘라버리기로 결정, 미군은 만일 이 과정에서 북한군이 대응할 경우 개성과 연백평야까지 국지전 계획을 세우고 미루나무 절단 작전을 완료합니다.

    8월21일 구사정전위에서 북한 측 수석대표가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관련해 북한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유엔군 사령관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구두 전달하면서 사건이 마무리 되었는데 내용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에서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이러한 사건들이 또다시 재발하지 않도록 쌍방이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板門店-蠻行事件, 영어: Korean Ax Murder Incident)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인근 공동 경비구역 내에서 조선인민군 군인 30여명이 도끼 를 휘둘러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주한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하고 주한 미군 및 대한민국 국군 병력 절대 다수에게 피해를 입힌 사건으로 판문점 사건,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 8·18 도끼 만행 등으로도 불립니다. 당시 사건 원인은 판문점 근처에 미루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미군과 우리측에서 가지치기를 하고 있던 중 북한 군이 가지치기를 하지 말고 돌아 가라는 경고를 미군측이 무시하면서 발생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발생 후에 북한 군이 사과를 하지 않았다면 미군과 우리가 북진을 할 좋은 명분 이였으나 겁을 먹은 북한 김일성이 바로 공식 사과문을 발표 하면서 사건을 마무리 되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판문점 유엔(UN)군 측 제3초소 남방 30m 지점에, 앞을 가리는 미루나무가 있어

    중대장 보니파스 대위가 한국 노무자 다섯 명을 포함해 14명의 인원을 데리고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그 때 난데없이 북한 경비병 30여 명이 몰려왔다.

    그들은 시비를 걸다가 유엔(UN)군에 도끼를 빼앗아

    보니파스 대위와 바레트 소위를 죽이고,

    8명의 중상을 입혔다.

    그 날 오후 5시, 북한은 전체 인민군(북한)군과 노동적위대, 붉은 청년 근위대 등

    모든 정규군과 예비군에 전투 태세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다음 날엔 조선 통신사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그들은 미군 장교를 죽인 사실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주한 미군도 북한을 응징할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유엔(UN)군은 한국과 의논한 끝에 미루나무를 베어 버리기로 하였다.

    한국군이 미루나무를 벨 때 북한이 덤빈다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 날 박정희 대통령은 3군 사관 학교 졸업식에서. . .

    의외로 강하게 나오는 한.미 양국의 행동에

    북한은 당황했다.

    결국 길일성이 유감을 표시한 사관문을 판문점을 통해

    전달함으로써 사건은 마무리가되었다.

    인민 무력 부장 최현은 작전 국장을 불러 화풀이를 했다.

    사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터졌을 때, 북한은 국가 동원령을 내려 평양과 황해도,

    강언도 등의 주민들을 소개시켰다.

    그 결과 일어나지도 않은 전쟁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큰 고통을 겪었다.

    너무 힘든 나머지 자살하는 사람까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