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숙번의 권력 남용과 독단적인 행동 때문입니다. 이숙번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들에게 세금을 과도하게 부과하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등의 행동을 했습니다. 태종은 이숙번의 이러한 행동을 비판하고, 그를 유배 보냈습니다. 이후 이숙번은 태종의 아들인 세종 대에 이르러서도 복권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숙번은 태조 이성계의 측근이고 이방원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1,2차 왕자의 난에서 큰 공을 세워 정사공신과 좌명공신에 책록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이 큰 것에 자만하고 다니면서 횡포를 많이 부렸습니다. 예를 들어 태종 14년 설을 맞아 상왕과 태종이 오는데 이숙번과 하륜이 국왕에게 예를 갖추지 않아 사간원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처벌을 반대하고 무례를 저질러 탄핵을 받았습니다. 결국 태종의 불신을 받아 권세를 잃고 경상도 함양으로 유배되어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이숙번은 무인일거라고 생각하지만 문인출신입니다. 이숙번은 이방원의 처인 원경왕후의 남동생들인 민무구와 민무질의 소개로 이방원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 쿠데타를 제안한 이방원의 말에 그런 일은 손바닥을 뒤집는 일보다 쉬운 일이라는 이숙번의 말에 이방원은 신뢰하게 됩니다. 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우며이숙번은 승승장구하게 되었고 2차 왕자의 난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서 이방원은 태종으로 즉위하였고 수많은 난을 평정하는데 앞장 선 이숙번은 안하무인의 절정의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유명한 일화로 자신이 공을 세워 받은 집이 돈의문(서대문) 근처였는데 오가는 인마로 시끄럽자 돈의문을 폐쇄하고 상왕인 정종의 집 앞쪽에 서전문을 만들어서 통행토록 할 정도로 권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양녕대군에게 뇌물을 바치다 발각된 구종수 형제를 태종은 유배를 보냈으나 유배를 가서도 정신을 못차리고 활과 말을 뇌물로 보내달라는 편지를 이숙번에게 보냈다가 이 편지가 태종에게 발각되어 이숙번은 함양으로 유배보내졌고 이후 태종은 이숙번을 찾지 않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