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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칠팔매132
똑똑한칠팔매13223.04.22

조선시대의 노비의 비율은 몇프로정도가 되었을까요?

조선시대의 신분으로 천민,양민,양반 이렇게 3가지로 알고 있는데요. 각 급별로 몇프로의 비율로 구성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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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22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1910년의 전국 호구조사에 따르면

    총 가구 289만 4,777호 중에서 양반의 가구 수는 5만 4,217호로

    전체 인구의 1.9%로 였다고 합니다.

    적게는 전인구의 3분의 1, 많게는 절반이 노비였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양반 7%, 중인 20%, 평민 45%,노비 35%였다고 하며 조선 후기에 권력에 뒤처진 양반들을 돈이 많아진 평민들이사들여 양반의 비율은 70%, 노비는 18%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전기 당시에 양반의 비율은 7%였고, 중인의 비율은 약 20%였으며, 평민의 비율은 약 45%, 노비의 비율은 약 35%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권력에 뒤처진 양반들을 돈이 많아진 평민들이 사들여 양반의 비율은 70%까지 치솟았고, 반대로 노비의 비율은 18%로 줄어들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17세기, 조선 시대 전체 인구의 30–40%가 노비였다고 합니다. 영남, 호남의 남부 지방은 그 비율이 더 높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생활이 어려워져 노비의 수는 한때 50% 까지 늘어 났다고 합니다. 노비 규모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은 1980년대 이후 대량으로 발굴되는 호적 자료들 덕분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 인구통계가 전국기준으로는 작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조선 초는 양반이 2프로, 중인이 5프로, 천민이 10프로 나머지는 양민이었습니다. 고려에 비해 양민이 획기적으로 늘은 것은 양민이 국가적으로 중요했기 때운입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신분제는 해이해졌으며, 이에 따라 노비수는 급감합니다. 양반 수는 급증했습니다. 전란과 전란 이후 재정적인 문제로 납속과 공명첩이 남발되면서 신분제의 변동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납세층인 양민의 수가 줄면서 세금 부담이 과도해져 농민반란이나 유망이 많아졌으며 결국 동학농민운동으로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 조선 초기에는 양반이 약 7%, 양인이 약 88%, 노비가 약 5% 정도인 것이

    조선 후기에는 양반이 70%나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노비가 약 30~40%인 것을 감안하면

    양반을 제외하면 모두가 노비라는 말입니다.

    노비가 30~40%인 것으로 파악하면 양반이 30~40%정도,

    나머지 양인이 30~40%정도인 것으로 됩니다.

    조선 후기에 노비가 증가한 것은 퇴계 이황이 양천교혼제도를 주장하면서 급격하게 증가하였습니다.

    퇴계 이황의 집에 노비가 3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