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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2.12.05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 차이점이 있나요?

영조와 정조 둘 다 탕평책을 시행한걸로 알고 있습니다.

탕평책을 통해 붕당간 다툼으로 정국이 혼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함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요?

시행한 이유는 동일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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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순수한낙타174
    순수한낙타17422.12.05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조가 탕평 정치를 실시하면서 왕은 정국의 운영이나 이념적 지도력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부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붕당의 정치적 의미는 차츰 퇴색됐습니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은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 사이의 치열한 다툼을 일시적으로 억누른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정조는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 지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책을 추진하여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 온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도 중용하였습니다.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중에서 유능한 인사를 재교육하는 초계문신 제도를 실시하고, 규장각을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조가 탕평 정치를 실시하면서 왕은 정국의 운영이나 이념적 지도력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부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붕당의 정치적 의미는 차츰 즐어들었습니다. 영조는 민생 안정과 산업 진흥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고 군역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하여 균역법을 시행하였고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하였습니다.속대전을 편찬하여 법전 체계도 정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은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강력한 왕권으로 붕당 사이의 치열한 다툼을 일시적으로 억누른 것에 불과하였지요. 정조는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책을 추진하여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 온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도 중용하였구요. 붕당이 커지는걸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중에서 유능한 인사를 재교육하는 초계문신 제도를 실시하고, 규장각을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영조가 탕평택을 시작하였다면 그 마무리는 정조가 지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영조의 탕평책은 소극적인 탕평책으로 자신을 등극하게 만든 노론 세력들로부터 왕권을 지켜내기 위한 저항의 성격을 가집니다.

    영조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했으며, 붕당의 근거지로 변질 된 서원을 대폭 정리했습니다. 또한 붕당끼리의 자리 싸움을 없애기 위해 이조 전랑의 권학을 축소였습니다.

    또한 탕평책을 바탕으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먼저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의 군역 부담을 2필에서 1필로 줄였으며,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삼심제를 실시하였으며, 신문고 제도를 부활 했습니다.

    정조의 탕평책은 적극적인 탕평책으로 실용 사상을 가지고 능력만 있다면 서자 출신이라도 중앙요직에 등용하여 실사구시에 입각한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정조는 외척과 환관 세력을 제거하고 노론, 소론, 남인을 골고루 등용합니다.

    정조의 개혁 정책을 살펴보면 규장각(왕의 정책 자문 기구)을 설치하여, 장용영(왕의 친위 부대)을 창설했습니다. 또한 젊은 관료들을 재교육하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했습니다. 서얼 출신 학자들을 규장각 검서관에 기용하고, 노비에 대한 차별을 완화했다고 합니다.

    제 답변이 도움이 되셨다면 ‘추천’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테스티아입니다.

    * 영조는 완론탕평 즉, 온건파였던 완론을 중심으로 하는(* 자신을 세제 시절 그래도 지켜줬던 소론 완론 + 노론) 탕평책이었던데 반해 정조의 경우 준론탕평 즉, 급진파였던 준론을 중심으로 하는(* 자기 자신을 지지해주었던 소론 + 남인계 인사들) 탕평이었다는 점에서 이 둘 다 100% 완벽한 의미의 탕평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부분도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