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옥균, 박영효 , 홍영식, 서광범 등 개화파의 일원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해 의사가 되었으며 미국으로 귀화하나 일시 귀국해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협회를 결성, 일제강점기에도 독립운동에 여러 방향으로 도움을 주었고 광복 후 미군정청고문으로 일하다 미국에서 영면했습니다.
자신이 서양 여러나라를 여행한 견문을 통해 신문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어 서재필과 유길준은 1896년 1월 하순에 새로운 신문사의 설립과 새 신문의 국문판 및 영문판을 동시에 3월 1일 창간하기로 합의합니다.
김홍집 내각도 이 신문 창간사업을 적극 지지하고 신문사 창설 자금과 서재필의 생계비를 정부 예산에서 지출하기로 결정해 승인서를 서재필에게 교부했으며 갑오경장을 추진한 개화파들은 신문 창간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서재필에세 월봉 300원의 거액을 지불하며 10년간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합니다.
그러나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이 일어나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고 유길준도 일본으로 망명해 배후세력을 상실했으나 아관파천 뒤 수립된 박정양 내각도 신문의 필요성을 인식해 협조했고 정부예산에서 신문사 설립자금으로 3000원과 서재필의 개인 생계비와 가옥 임대를 위해 1400원을 지출했습니다.
정동에 있는 정부 소유의 건물을 사옥으로 빌려 독립신문사를 설립, 1896년 4월 7일 창간호를 발행하여 창간 당시 독립신문은 가로 22cm,세로 33cm의 타블로이드 판 크기로 모두 4면이었으며 제 3면까지는 국문판, 제 4면은 영문판으로 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