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의 묘호는 왜 열조에서 변경되었나요?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던 인조가 죽고나서 그의 아들은 역대 왕들처럼 자신의 아버지의 묘호를 정하는데 이 당시에 처음 논의된 열조라는 묘호는 왜 폐기되고 인조로 결정이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조(仁祖)"라는 묘호는 성군 중의 성군에게 주어질 수 있는 매우 명예로운 묘호였습니다. 인조는 열조(烈祖)였으나 인조로 변경되었다고 합니다.
‘열(烈)’자가 중국 오대십국 시대 남당의 황제 서지고의 묘호이므로 쓸 수 없다는 반론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미 선대에 인종이란 묘호가 있으므로 또다시 ‘인(仁)’ 자를 묘호로 올리는 데 대한 논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종 때 선왕의 묘호를 세종이 있음에도 세조로 정한 선례가 있고, 명나라에도 인종과 인조가 있었다는 이유로 인조로 확정됐습니다. 그의 능호는 먼저 죽은 인열왕후의 능호 장릉을 그대로 썼습니다.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조는 1649년(효종 원년)에 열조(烈祖)의 묘호를 받았으나, 8일 뒤 인조(仁祖)로 개정되었습니다.
열조는 열등하다는 의미보다는 굳셈, 강렬함, 공덕이 많다는 긍정적인 의미의 묘호이만 효종은 아버지를 위해 인을 베풀고 의를 따르는 성리학의 최고 덕목인 인조로 하고 싶었습니다. 따라서 묘호를 바꿀 당시 논란이 있었는데 '열' 자가 남당 서지고의 묘호라 하여 고쳐야 한다는 주장을 따르자 촉한의 유비도 사용한 묘호라 하여 고치지 말 것을 청했습니다. 심대부는 조(祖)와 종(宗) 사이에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며 선왕인 세조와 선조의 묘호도 옳지 않다고 주장했고, 유계는 인종의 묘호와 겹치니 협의를 분별하는 뜻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후에도 반대 여론이 있었으나 효종은 듣지 않고 묘호를 인조로 결정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