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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윤 축복
승윤 축복23.04.19

선조가 임진왜란 이후에 무리하여 여진을 정벌하려고 하였다고 하는데 맞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역사에 관심이 많은 축복입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전후복구 사업을 하기도 벅찼을 것 같은데 전후 선조는 여진과의 전투를 많이 벌였고

1599년에는 노토부락을 정벌하여 누르하치가 쉽게 여진을 통일 할 수 있는 단초도 제공하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여진을 압박하여 공격하였다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여진이 커지는 것을 미리 눈치를

채고 그들을 미연에 제압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되는데 우리가 배운 선조는 임진왜란시 한양을

버리고 간 책임감 없는 군주였는데 임진왜란을 격으면서

국제정세에 눈이 트인 것인지 여진의 위험을 알고 무리를 해서라도

그들은 제압하여 그들의 통합을 막고 조선의 안녕을 기원 한 것인지 1598년 부터 1608년까지의 역사가 궁금하여

질문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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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산(茂山) 부근에 있던 노토(老土)의 부락은 1598년경부터 조선의 변경을 위협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에서는 이를 정벌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599년(선조 32) 함경감사 윤승훈(尹承勳)이 노토 정벌의 의견을 올리자, 선조는 사헌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를 윤허하였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맞습니다. 여진은 1598년경부터 조선의 변경을 위협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에서는 이를 정벌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1599년(선조 32) 함경감사 윤승훈(尹承勳)이 노토 정벌의 의견을 올리자, 선조는 사헌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를 윤허하였다고 합니다. 그 결과 1600년(선조 33) 4월 14일 병사(兵使) 이수일이 이끄는 3천 명의 정벌군이 출병하여 명천현감(明川縣監) 이괄(李适)·회령부사 조경 , 길주목사 양집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3로로 나누어 진격해서 가옥 1천여 채를 불태우고 적 110명을 참수했다고 합니다. 이번 원정에서 조선군 전사자는 7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대규모 여진족 집단에 큰 타격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함경도 지역의 여진족들이 다시금 조선에 복속하도록 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파병은 대규모 정벌이 아니라 최대 3천명 정도의 규모라서 이는 고려말 5만의 군사로 요동정벌을 했던 것이 랑은 차원이 다른 소규모 병력 이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