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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비단벌레771
반가운비단벌레77123.05.07

사실상 독립운동가였던 윤치호의 업적 관련 분야는 무엇이었나요?

윤치호라는 인물에 대해 흥미를 느끼게 되었는데요 윤치호는 어떤 경력을 가지고 있었나요?

그리고 그의 주요 업적은 무엇이며 생애는 어떻게 흘렀는지 자세하게 읊어주시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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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내선일체는 ‘내지(內地)인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뜻으로 일제가 시행한 황민화 정책 중 하나입니다. 이 개념을 한국 지배에 본격적으로 적용한 이는 1937년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였습니다. 미나미 총독은 중일전쟁이 장기화하여 일본제국 전체가 총동원체제를 구축하게 되자 침략전쟁 수행 및 전시 한국인 동원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황민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미나미 총독은 내선일체를 “반도 사람을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는데, 한국인의 자발적인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내선일체의 실현이 시급하였습니다.

    미나미 총독과 총독부의 황민화 정책 추진에 발맞춰 친일파들은 한국인들의 자발적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일제의 정책을 옹호하는 언설을 널리 유포하였습니다. 이광수와 윤치호는 당대의 한국인 유력자로서 이들의 말과 글은 한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위의 자료는 주목됩니다.

    『매일신보』에 글을 투고한 이광수는 궁성요배라는 행위를 소재로 하여 내선일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내선일체가 “단순한 정책적 슬로건이 아니라 우리 조선 민중에게는 생활 전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면서, “내가 재래의 조선적인 것을 버리고 일본적인 것을 배우는 것”이 내선일체의 요체라고 하였습니다. 최후의 이상으로서 “조선의 2,300만이 모두 호적을 들추어 보기 전에는 내지인인지 조선인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그는 한국인들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으로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꼽았습니다. 그가 중요시한 충성심은 종교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일본인의 충의 감정은 한자의 충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니, 도리어 유대인의 여호와에 대한 충과 비슷할 것”이라고 한 데에서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윤치호는 「내선일체에 대한 소신」을 집필하여 내선일체에 대한 소신을 밝혔습니다. 첫째로 내선일체는 미나미 총독 부임 후 새삼스레 나온 것이 아니라, 일본이 한국을 병탄한 이후 계속 전개되어온 식민 정책의 일환이라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둘째로는 ‘동양 건설’(본질은 동양 정복)을 위한 병참 기지로서 조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셋째로는 조선이 내선일체를 선택하지 않을 경우 남은 대안은 공산주의인데 이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넷째로 내선일체가 결국 일본을 주(主)로, 조선을 종(從)으로 설정하는 것이라는 비판에 대해 일시동인은 황송하게도 ‘천황 폐하의 성지’라는 점을 들어 비판을 논박하고자 하였습니다.

    내선일체의 논리가 횡행하던 시절은 일본이 중국대륙 침략을 감행한 후 모든 국가적 역량을 전쟁 수행에 쏟아붓던 때였습니다. 침략전쟁을 벌이면서 일제는 한국을 병참의 후방기지로 활용하고자 하였고, 물자와 인력을 전쟁터로 보내 침략전쟁을 원활하게 수행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국인을 완전한 일본인으로 만들어야 했고, 이런 논리를 설파하는 데에 한국의 지식인만큼 효과적인 수단은 없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평가받던 이광수와 윤치호가 동원된 것이고, 이들은 유려한 필치로 내선일체를 옹호함으로써 일제의 의도를 충족시켜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