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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찬밀잠자리170
대찬밀잠자리17023.05.23

임진왜란때 의병으로 싸운 사람들은 포상이 있었나요?

임진왜란때 낙향하거나 벼슬을 버리고 지방에 있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고 하던데 전쟁이 끝난 후에 어떤 포상이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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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군공청(軍功廳)


    조선중기 주요 전쟁 시기 군공을 세운 자를 조사하여 포상하기 위해 임시로 세운 관청.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각지에서 군공을 세운 군사나 의병을 조사하여 포상하기 위하여 그해 11월 군공청을 설치하였다. 임진왜란 중 각지의 군공 조사를 전담하여 공평하게 포상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청탁과 관리의 농간으로 인해 적지 않은 문제가 나타나 1603년(선조 36) 4월 혁파되었다. 이후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 농성전에 참여한 장수와 군사들의 공죄(功罪)를 조사하기 위해 군공청이 설립되었고, 전쟁 이후에는 다른 지역의 군공을 조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출처:sillok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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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입니다.

    ✅️ 의병의 경우 정식 군사조직이 아닌 자발적인 무력항쟁을 위해 조직된 것이었으므로 이 의병들에 대한 별다른 포상은 없었습니다. 물론, 일부 의병장으로서 추후 독립군으로 편입되거나 한 경우는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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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쟁 중 포상제도가 정확히 정해진 것은 없었지만, 벼슬을 내리거나 포상하는 등의 기록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8월15일 조정에서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토벌하는 것을 가상히 여겨 조헌을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의 벼슬을 내렸다. 이후 조헌은 관군의 방해로 흩어지고 남은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8월16일 영규의 군대와 함께 청주를 떠나 금산으로 전진했다. 이때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은 18일자로 약속된 금산성 공격 날짜를 미루자고 하였으나 조헌은 이에 따르지 않고 금산으로 진격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일본군은 후속부대가 없다는 것을 알고 교대로 공격해왔고, 조헌의 700의병은 수에서 밀려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이것을 2차 금산성 전투라고 부른다.

    10월에 조정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를 증직하였다. 조헌과 김제갑, 남정유, 승장 영규를 증직하였다.

    1593년 11월에 광해군이 아들 완도를 불러 포상하고 황신(黃愼) 등을 보내 치제하였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173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83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1971년에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문집으로 〈중봉집〉이 있다.

    다음의 내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311800&code=kc_age_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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