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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비단벌레771
반가운비단벌레77123.05.07

김옥균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고싶어요

우연한 기회에 책을 보게 되었는데요 궁금해서요

김옥균은 어떤 시기에 활동했었고 그가 담당한 역사 분야와 그의 대표작품은 무엇일지요?

그의 작품이 어떻게 현재의 역사 연구에 기여했는지와 김옥균의 생애도 알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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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07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고종 시기의 정치가, 개화사상가입니다.
    1851년(철종 2년)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이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계몽 운동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후 서구 문물의 중요성을 깨닫고 급진개화 세력에 참여하여 1884년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과 함께 갑신정변을 주동했으나 실패하고, 국외로 도피했으나 홍종우에 의해 피살되었다.

    대표 저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화근사 (箕和近事)
    치도약론 (治道略論)
    갑신일록 (甲申日錄: 手記)

    출처: 나무위키 김옥균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3일 천하 김옥균이라고 알고 있지요.

    당시 고종시기 개화파의 수장이었습니다. 조선을 일본의 메이지유신처럼 급진적인 개혁을 통해 빠르게 근대화시키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력이 약하여 일본과 손을 잡았다는 점, 당시 청나라의 군사력을

    간과했다는 것 등이 한계로 남지만 그들의 패기와 나라를 위한 노력 등은 본 받을 만 합니다. 무너져사는 나라 조선을 어떻게든

    다시 세워보려 노력한 조선의 엘리트 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옥균의 사상 경로는 오세창의 증언으로 구성되어 있습나다. 오세창은 오경석의 아들로 아버지와 그의 친우 유홍기의 영향으로 개화파의 일원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1886년 박문국 주사로 임명되어 한성주보발간에 참여하고 1894~1895년 군국기무처 낭청, 공무아문 참의, 농상공부 참서관·비서관·통신국장 등을 역임하면서 갑오개혁에 참여했습니다.

    김옥균은 개화파의 영수이며 1884년 발생하는 갑신정변의 주역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 근대를 추동한 개화사상의 형성 경위를 파악하게 하는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경석의 70여년 전의 기억에 의존한 증언이기 때문에 사실 왜곡이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특히 자신의 부친과 관련한 내용은 미화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핵심 내용을 살펴보면 오경석이 중국을 오가며 세계 각국이 각축하는 상황을 보고 들은 후 세계 각국의 지리, 역사에 관한 책을 조선으로 들여왔습니다. 오경석은 이것을 친구 유홍기에게 전해져 연구되면서 조선의 개혁이 고민되기 시작했으며, 유홍기는 이러한 책과 조선 개혁에 대한 사상을 김옥균에게 전함으로써 김옥균의 사상이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국 개조, 즉 한국 개혁에서 오경석이 예언자, 유홍기가 지도자, 김옥균이 담당자의 역할을 맡았다고 보고 있다. 여기에서 추출되는 역사적 의미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개화사상 형성의 자생적 측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과거 연구에서는 개화사상 형성에 외래적 요소 특히 일본 후쿠자와 유키치로부터의 영향이 강조된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자료에서 발견되는 오경석, 유홍기, 김옥균의 연결성은 개화사상이 자생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오경석이 역관으로 중국을 오가며 서양국가들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위기의식 속에서 서양에 관한 책들을 수입해 들여와 읽었다는 설명은 쇄국이라는 제약된 상황에서 개화사상 형성의 지적 토대가 어떻게 마련되었는지를 계기적으로 설명해줍니다.

    둘째, 개화사상의 형성 시기를 대략적으로 가늠하게 합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개화사상의 형성 시기를 1850년대부터 1880년대 초반까지 다양하게 보고 있습니다. 모두 각각 설득력 있는 근거가 제시되고 있는데, 이 자료는 개화사상의 형성 시기를 1870년대 전반으로 보는 근거로 활용됩니다. 이 자료에 의하면 김옥균이 유홍기를 만난 것은 나이 20세 전후 즈음이고,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에 있으면서 동지를 구하는데 노력했다고 합니다. 김옥균은 1851년 생이고, 1872년 알성시에 장원급제해 1874년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김옥균은 대략 1870년을 전후한 시기에 유홍기를 만나 개화사상을 형성하고 1870년대 전반기부터 동지를 구하기 위한 활동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셋째, 개화사상 형성에서 중인 신분의 역할을 확인하게 합나다. 자료에 나와 있다시피 오경석은 역관으로 중인 신분입니다. 유홍기는 주로 의업에 종사하는 중인 신분으로 보는 편이지만 양반 신분이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개화사상 형성에 중인 신분이 기여한 측면은 개화사상, 나아가 한국 근대 개화운동이 특정 신분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개화승 이동인이나 갑신정변의 다양한 참여층 분석을 통해서도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옥균은 조선 후기 갑신정변으로 유명한 인물로 아래의 내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9911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옥균은 우리나라 개화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자 갑신정변의 주모자이다. 1870년대 개화사상을 수용하였고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1884년 12월 우정국 준공 축하연 날에 갑신정변을 단행하였다. 청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양반 지배체제 청산 등의 정령을 반포하는 개혁을 진행하였지만, 46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다. 이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1894년 다시 상하이로 망명하였으나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였다. 갑오개혁 시기에 사면 복권되었고, 1910년에 충달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872년 22세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874년 이후 박규수와 접촉하여 개화사상을 수용하였고, 이후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과 함께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1879년 개화승 이동인을 일본에 파견해 일본의 근대화 실태를 알아보게 하였고,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의 파견 주선을 유도하였다. 국내에서 혁신의 뜻을 가지고 있는 관리들과 청년들을 모아 개화당의 세력 확장에 진력하였다.

    김옥균은 스스로 일본의 근대화 실정을 시찰하기 위해 1881년 음력 12월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진전 과정을 돌아보고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가들과도 접촉하여 그들의 정치적 동향 등을 상세히 파악하였다. 돌아오는 도중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에 이르렀을 때, 본국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귀국하였다.

    제1차 도일(渡日) 직후에 『기화근사(箕和近事)』를 편찬하였다. 이때 일본의 정치가들과 접촉하여 국제정치 등을 파악하였다. 이후에도 1882년 수신사 일행으로도 참가하여 일본에 갔다. 그리고 1883년 6월부터 1884년 5월까지 약 1년간 체류하면서 차관(借款) 300만 원을 구하기 위해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귀국 후 그는 조선의 상황에서는 정변(政變)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준공 축하연 날에 갑신정변을 단행하였다. 우선 축하연에 참석한 민영익에게 부상을 입힌 후 국왕과 왕비를 경우궁으로 옮겨 50여 명의 개화파 군사력과 200여 명의 일본군으로 호위케 하고 수구파 우두머리를 처단하였다.

    이어서 개화파들은 홍영식이 우의정, 박영효가 좌포도대장, 서광범이 우포도대장, 김옥균이 호조참판이 되어 군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하고 정령을 제정 · 발표하였다. 정변의 실패로 정령 · 정책이 실현되지는 못하였지만, 그중 14개 조가 뒷날 김옥균이 일본에 망명하여 저술한 『갑신일록(甲申日錄)』에 실려 있다.

    주요 내용은 청국에 대한 종속 관계 청산, 문벌 폐지와 인민 평등권의 제정 및 능력에 따르는 인재 등용, 지조법(地租法) 개혁, 탐관오리 처벌, 백성들이 빚진 환자미(還子米)의 영원한 면제, 모든 재정의 호조 관할, 경찰 제도의 실시, 혜상공국(惠商工局)의 혁파 등이었다.

    청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지향하였다. 아직 국민국가 수립을 위한 적극적인 자세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양반 지배체제 청산을 시도하였다. 또한 뒷날 동학운동에서 요구된 농민적 토지 소유가 제기되지는 않았으나 지조법의 개혁이 제시되었고, 왕실 경비와 정부 재정을 구분하고 호조가 국가 재정을 전담케 하며 특권 상인의 존재를 부인한 것 등은 개화파의 국정 개혁 의지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국왕의 정치 혁신 조서가 내려짐과 동시에 청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이 패퇴하자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다. 정변이 실패한 후 일본 측은 오히려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사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와 1885년 1월 한성조약이 체결되었다.

    김옥균은 박영효 · 서광범 · 서재필 등 9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여 1884년 12월 13일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정변에 실패한 그와 그의 동지들을 푸대접하였다. 이들의 망명 사실은 곧바로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

    갑신정변의 사후 조치로 조선 및 청국과의 교섭이 예정되어 있던 일본 정부는 갑신정변에 대한 책임 회피를 외교 방침으로 채택하였던 것이다. 결국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1886년 8월 오가사와라섬〔小笠原島〕에 귀양을 보냈으며, 1888년에는 홋카이도〔北海道〕로 추방하여 연금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1894년 3월 다시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으나 자객 홍종우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이후 시신은 비밀리에 조선으로 송환되어 다시 능지처참되었다. 4개월 뒤 갑오개혁으로 개화파 정부가 수립되자, 이듬해 법부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의 상소에 의해 사면, 복권되었다.

    이후 을미사변, 아관파천, 을사조약, 국권피탈 등으로 이어지는 혼란한 시국 속에서도 김옥균은 근대적 문명개화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러일전쟁, 을사조약 등 1900년대 초반의 격변은 그를 사회적으로까지 복권시켰다. 1910년에 김옥균은 급기야 충달공(忠達公)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규장각 대제학으로 추증되었다.

    출처 :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552884&cid=46623&categoryId=46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