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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마더77
망고마더7723.09.21

조선시대 여성들이 착용한 가체(가발)은 어떻게 만들었나요?

문득 책을 읽다 보니 조선시대 여성들도 가발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런 가발은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만들었고 부분 가잘인지 전체 가발인지 또 어느 계층에서 주로 사용 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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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9.2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가채는 남성의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졌다고하며 신분에 상관없이 머리카락을 팔아야 할정도로 빈곤한 사람들의 머리카락으로 만들었다고합니다. 조선중기 이후부터 혼인한 여인들이 가채를 신분의 상징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가채가 높을수록 그 여인의 신분이 아주 높다는 것을 나타내었다고 합니다. 조선후기이후로는 가채가 금지됐는데 국가적인 행사때에는 궁중여인들이(대비, 중전, 후궁들과 품계가 높은 부인)가채를 썼다고들 합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가체가 처음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통일신라시대로, 중국 당나라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가체는 조선 양반 여인네들의 사치품이 였고 그 사치는 날로 심해져 조선 성종 때에는 30cm 높이가 되었다고 한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 들어서 가체의 수요가 크게 증가하면서 가체의 가격도 천정부지로 치솟아서 가격대가 엄청난 사치품이 되었고, 최고 비싼 가체는 지금돈 수십억원을 넘으며 당시 기와집 2~3채, 혹은 노비 수십 명을 구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가체란 여자의 머리숱을 많아 보이게 하거나 머리 모양을 꾸미기 위해 자신의 머리 외에 다른 머리를 얹거나 덧붙이는 것을 말합니다. 가체는 조선시대 왕실과 상류층 부녀자들 사이에 있어서 아름다움이자 부의 증표였습니다.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신분질서가 붕괴되고 서민경제력과 신분상승으로 양반의 전유물이었던 가체는 서민들의 일상생활에 자리잡게 됩니다. 수요가 늘어나자 가체의 가격은 폭등했고 1750년에 쌀 한가마 값은 3냥인데 가체는 60-70냥이나 되었습니다. 사치가 만연하자 영조는 가체금지령을 내리고 문벌이 좋은 부녀자의 가체는 금하고 족두리를 쓰게 했으나 단지 명일뿐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가체의 가격이 과거에는 100냥이었는데 지금은 400-500냥이며 심지어 보석이 달린 가졔는 1000냥에 가까웠다라고 일성록(1783년 7월 7일)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조는 더욱 엄격히 가체금지령을 내려 양반 집안과 어염집 부녀자들의 가체 사용을 금하였지만 이로 인해 처벌받은 사례가 없었고 궁중에서는 금지가 해당되지 않아서 가체를 쓸 수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가체는 머리카락으로 만들었는데 자연적으로 기른 머리카락이기 때문에 공급이 적었고 당주홍, 홍합사, 황밀, 송진, 진사, 주사, 마사, 홍향사, 연지, 소금, 참기름 등을 사용해 수거한 머리칼을 담가 곧게 펴 탈색 후 검은색으로 염색해 만들었습니다.

    조선 후기 가체의 수요가 크게 증가하면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게 되며 엄청난 사치품이 되었고, 형편이 어느 정도 되면 반드시 장만해뒀다가 예의를 갖춰야 하는 자리에 얹고 나가기도 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여성들과 기생들이 가체를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