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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1.17

이순신 장군이 기록한 난중일기는 어떤내용인가요?

TV에서 난중일기에 대해 내용이 나오던데 그 일기는 주로 어떤 내용이 들어있나요?

일반 일기 내용과 같은 내용인가요? 아니면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한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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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순수한낙타174
    순수한낙타17423.01.17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난중일기는 제목 그대로 전쟁 중에 장군이 작성한 일기입니다.

    그 안에는 개인적인 이야기도 들어있고, 전쟁과 관련된 기록도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순신의 일상 또는 전쟁 그런 내용들입니다

    실제 내용이 있어서 첨부합니다.


    임진년 (선조 25년 : 서기 1592년(48세))/ 1592년 1월 1일 ∼ 8월 27일

    임진란이 일어나기 1년전(신묘년)에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수사로 여수에 부임한 충무공은 미구에 왜란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좌수영 관할 아래 모든 군사를 훈련시키고 장비도 보강 하는등 온갖 방비를 주력하였다. 임진년 4월 12일에 거북선을 완성 시범 항해를 하자 하루뒤인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 다. 공은 전선 24척을 모아 5월 4일 출동하여 5월 7일 제1차 옥포해전을 승리로 이끈데 이어, 5 월 29일 경상도 사천에서 승첩하고 6월 2일 당포에서 승첩하였으니 이것이 제2차 당포해전 이었다. 그리고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제3차 한산도 대첩을 거둔후 9월 1일 부산 앞바 다에서 제3차 한산도 대첩을 거둔후 9월 1일 부산 앞바다에서 제4차 부산대승첩을 거두어 완전히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계사년 (선조 26년 : 서기 1593년(49세)) / 1593년 2월 1일 ∼ 9월 14일

    계사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으나 명나라 제독 이여송은 자기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던 공은 7월 15일 여수 좌수영 본영을 그대로 둔채 전투 본부를 거제 한산도 진으로 옮겨 왜적을 무찌를 준비를 하였고, 조정에서는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위를 새로 만 들어 8월 15일 공을 임명하여 삼도 수군을 통괄하는 한편 전라좌수사까지 겸임하게 하였다. 이 자리에서 공은 장기전에 대비하여군무에 정진, 수만석의 군량을 확보하고 전선을 만들었 으며 각종 무기를 준비하였다.


    갑오년 (선조 27년 : 서기 1594년(50세)) / 1594년 1월 1일 ∼ 11월 28일

    명나라 장수들은 일방적으로 강화를 주장하고 싸움을 피하려고만 하였다. 3월에 명나라 지 휘관은 공에게 싸움을 중지하고 돌아가라는 패문까지 보냈고, 공은 우리 땅에 있는데 어디 로 가란 말이냐고 항의까지 하였다. 전염병으로 10여일을 앓는등 자주 아팠으나 군무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전염병으로 죽은 군사와 백성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주고 또 글(제문)을 지어 위로해 주었다. 10월에는 장문포의 왜군을 수륙 연합으로 협공하여 승리하였다.


    을미년 (선조 28년 : 서기 1595년(51세) / 1595년 1월 1일 ∼ 12월 20일

    나라는 휴전상태에 들어갔으나, 공은 한산도 진에서 항상 바쁘게 생활했다. 군량을 준비하고 군사를 훈련시켰으며, 전선을 정비하였다.


    병신년 (선조 29년 : 서기 1596년(52세)) / 1596년 1월 1일 ∼ 10월 11일

    전쟁 중에도 공은 항상 어머님을 잊지 못하였다. 일기 도처에 어머님에 대한 걱정이 나타나 있으며, 휴전중의 말미를 이용하여 잠깐동안이나마 어머님을 위로해 드리면서 행복을 느끼 기도 하였다. 병신년은 어머님이 82세 되시던 해로 10월 7일에 본영(여수)에서 수연 잔치를 차려드린 것이 모자가 만난 마지막 기회였던 것이다.


    정유년 (선조 30년 : 서기 1597년(53세)) / 1597년 4월 1일 ∼ 12월 30일

    왜와의 화의가 깨어지자 왜적은 다시 침략을 감행하였다. 정월, 선조대왕은 공에게 출병할 것을 명하였으나 일본측의 간계를 꿰뚫어 본 이순신은 본 영을 벗어나 함부로 출동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하여 공은 옥에 갖히고, 노모는 이 소식을 듣고 고음천(여천)으로부터 고향 아산으로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서 별세하였다. 28일의 옥고를 치르고 백의 종군이 되어나온 공은 아산에 가서 어머님의 영구만을 보고 치 상도 끝내지 못한채 전쟁터에 나가야만 하였다. 그러던 중 7월 16일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삼도 수군은 전멸하였고, 다시 삼도 수군 통 제사가 된 공은 9월 16일 패잔 전함 12척으로 왜적 대함대 133척을 무찔렀으니 이것이 저 유명한 명량대해전이다. 그러나 10월 10일 셋째 아들 면의 부음을 듣고 공은 비통함에 잠긴다.

    무술년 (선조 31년 : 서기 1598년(54세)) / 1598년 1월 1일 ∼ 11월 17일

    임진란이래 7년의 긴 전쟁은 수 많은 생명과 재산을 빼앗아 갔으며, 충무공에게는 최후의 전자이 시시각각 다가왔다. 7월 명나라 수군과 연합 함대를 결성한 우리 수군은 11월 19일 노량 앞바다에서 퇴각하는 순천 소서행장의 군대를 공격 큰 타격을 입혔는데 이 전투가 저 유명한 노량해전이다. 이때 공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으나 공의 나이 겨우 54세로, 마침네 충무공은 자기의 한 몸을 던져 조국을 위기에서 영원히 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