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는 어느 나라 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샤워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대부분의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아침, 저녁으로는 하고, 중간 중간 운동하시는 분들은 추가적으로 더 하기도 하니까요.인터넷에 개인위생에 가장 민감한 나라들로 샤워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 순위가 있어서 가져와 봅니다. 1위 일본, 2위 한국, 3위 스웨덴, 4위 독일, 5위 노르웨이, 6위 네덜란드, 7위 덴마크, 8위 프랑스, 9위 캐나다, 10위 스위스[출처] 샤워를 많이 하는 나라 TOP 10 (tistory.com) 어떤 통계인지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아서 상기 출처를 첨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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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는데, 왜 르네상스라는 말은 프랑스어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탈리아는 고대 로마제국의 발상지였습니다. 이탈리아는 유럽 국가 중에서도 가장 번영하고 부유한 국가였습니다. 그래서 예술, 역사적 가치 등을 알아보는 안목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천한 출신의 권력가, 지배자들은 그것을 커버하기 위해 학문과 문화에 대한 후원으로 부족한 역량을 보상, 보충하기도 하는 정치적 상황도 있었습니다.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니노플이 오스만제국에 함락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멸망한 비잔티움 제국의 많은 고전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넘어오게 되는 시대적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될 수 있었던 여러가지 상황이 마련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이탈리아어로 Il Rinascimento(Rinasimento)라는 어원을 가진 르네상스라는 말은, 프랑스 역사가인 미슐레가 프랑스어인 Renaissance라는 말로 확립시켰으며 이것이 영어에서도 그대로 사용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그 개념을 정립시킨 건 프랑스 역사가 미슐레이므로 이후 평가한 학자와 학계에 의해 르네상스라는 명칭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Re는 '다시'라는 뜻이고, nasissance는 '탄생, 태어남'의 뜻으로 문예부흥 운동으로 신의 중심 문화에서 인간 중심의 문화로의 변화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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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최초로 전기를 사용한 시기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에 전기가 들어온 시기는 1887년 3월 6일입니다. 장소는 경복궁 내 건청궁입니다. 이것은 에디슨이 백열전등을 만들고 8년도 채 안 되어 우리나라에 전기가 들어온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던 전기가 10년도 되지 않아 우리나라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중국과 일본에도 들어가기 전입니다. 궁 내에 향원정이라는 연못에 발전기를 세웠는데 당시로서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성능의 발전기로 무려 16촉광으로 백열등을 750개 켤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합니다. 당시 사용한 발전기의 조립, 설치, 전등의 가설은 미국의 윌리엄 멕케이라는 전기기사가 했습니다. 석탄을 연료로 하여 향원정 연못의 물을 끌어 발전기를 돌렸다고 합니다. 당시 기술이 완전하지 않았던 탓에 자주 정전이 되어 ‘건달불’ 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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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고싶어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환구단에서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고종부터는 황제라고 칭합니다. 1895년 고종의 부인인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서 살해됩니다. 명성황후가 조선에 암적인 존재였지만, 우리 내부가 아닌 일본에 의해서 살해된 것은 치욕적이면서도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이에 고종은 다른 궁으로 피신할 수도 없고,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까지 발전했던 청나라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이미 1894~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조선의 일에 간섭할 수도 일본에 대항할 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종은 러시아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고 러시아 공관인 '아관'으로 몸을 숨기게 되어 이 사건은 '아관파천'이라고 합니다. 이후 1년 정도 있다가 덕수궁을 증축한 후 돌아가게 됩니다. 돌아와보니 이제 청도 조선에 관여하지 않고, 눈치 볼 일도 없다고 판단하여 1897년 10월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대한제국이라고 국호를 바꾸게 된 것입니다. 광무라고 하는 연호도 사용했습니다. 이후 국제사회에서 대한제국을 주권국가로 확립하기 위해 군사제도 개편을 비롯한 제도를 개편하고, 근대화를 위한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당시의 연호를 빌어 <광무개혁>이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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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때 용골대라는 인물은 실존 인물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용골대는 청나라 개국 당시 군인이자 정치인으로서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침공했을 때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에게 항복을 받아낸 인물입니다. 만주족의 타타라 씨족의 일원이고, 청나라 창업군주인 누르하치와 차기 군주였던 홍타이지에게도 신임을 받던 인물입니다. 우리에게는 적이었으니 좋지 않게 평가되고 있죠. 하지만 용골대는 청의 입장만을 고수하지 않고 조선을 형제의 나라로 인정하고 외교적으로 풀어가려고 했기에 청에서 요구한 군신관계를 맺기는 하되 좋은 조건을 조선에도 제시하여 인조는 감사의 뜻으로 용골대에게 은 2,000냥을 하사했고, 용골대를 그것을 그대로 자신의 왕에게 바칠 정도로 청렴했었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사실 청나라 이전에 세워진 금나라는 쇠 금 金의 한자를 쓰는 나라였는데 이것은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세운 나라라고 하여 당시 중국 쪽에서는 신라 왕족의 후손이 세웠다 하여 또다른 신라로 인정할 정도라고 하니 우리와 동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나라도 이후 후금과 몽골 등을 통합하였고, 여진족이라고 하는 여진은 고려, 고구려의 여, 발해의 정식 국호인 진국의 진의 사람들이라고 하여 여진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와 한민족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청나라는 처음에는 우리와 형제관계이기를 원했고, 명을 제압할 정도로 강력해졌을 때 군신관계로 바뀌기는 했어도 과거 다른 중국의 국가들과는 달리 조선에 대한 예우를 갖췄던 것으로 보아 이렇듯 같은 민족이었다는 역사가 있어서 그랬지 않나 추측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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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왕들은 왜 빨간색옷을 입었던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시대가 막을 내리고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에서 처음에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올랐을 때 붉은 색이 아닌 푸른색 곤룡포를 입었었다는 것을 어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우선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것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선위의 형식으로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고 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 당시 중국 명나라에서는 정식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고려의 왕을 대신하는 권지고려국사라는 직책을 내리게 됩니다. 이에 이성계는 계속해서 고려의 복색인 푸른색 곤룡포를 입었던 것이 아닌가 판단됩니다. 태종에 이르러 명에서 조선을 인정하고 그 복색을 붉은 색으로 정하여 주었고, 그 때부터 붉은색 곤룡포를 입었다고 합니다. 당시 중국의 황제는 노란색(황금색) 옷을 입었고, 황제의 색이라 다른 주변국들은 같은 색 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고, 입을 경우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겨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국력이 강한 중국 명나라가 주변국의 국왕을 외교적으로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게 하였으며 복색도 정해주어 상하 관계의 질서를 잡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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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배달문화가 발달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국에서 배달 문화가 발달한 이유를 몇 가지로 추려보겠습니다.우선 좁은 국토와 높은 인구밀도를 들 수 있습니다. 다가구 주택이나 아파트가 밀집되어있고, 대부분은 그러한 지역에 음식점 등의 상가가 밀집되어있습니다. 사무실도 마찬가지로 밀집되어있죠. 그러다 보면 가게에 받을 수 있는 고객의 수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게 되고 이에 더 많은 고객에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 배달이라는 것이 생겨나고 확산되게 되었습니다. 두번째로 한국의 문화적 특성입니다. 한국은 아주 이른 시간에 출근하고, 늦게까지 일하여 일과 생활이 매우 피로한 사회입니다. 이에 과거처럼 집에서만 음식을 해먹을 시간과 역량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커버하기 위한 서비스로 배달이 각광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한국은 빠른 변화와 속도에 대한 갈망이 있는 문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공간에서나 어느 시간대에서나 빠르고 신선한 음식을 제공받기 위해서는 직접 식당을 방문하는 것보다는 주문하여 배달을 받는 것이 더 좋은 서비스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배달문화가 급성장하게 된 이유는 IT기술의 발달입니다. 스마트폰 보급률이 95%가 넘는 상황이고 배달앱 등이 발달하게 되면서 더욱 편리하게 주문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 전화로만 배달주문을 하던 것이 대면하지 않고 앱으로 손쉽게 할 수 있게 되면서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배달하는 쪽에서도 네비게이션 시스템이 발달하면서 과거보다 더 빨리 정확한 지역으로 배달할 수 있게 되어 시간이 더 절약되었습니다. 이처럼 여러가지 복합적인 사유로 인해 다양한 음식을 빠른 시간에 제공할 수 있는 배달문화가 극도로 발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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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보물은 어떻게 지정되는지 기준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한민국의 국보와 보물은 그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은 약간은 평가위원들의 주관적인 판단과 의견도 많은 것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지만 평가위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그 대상의 시대적 대표성과 유일성, 특이성 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국보의 지정 기준은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높고 오래 전에 제작되어 시대를 대표하거나, 제작 기법이 우수하고 유일하거나, 형태 품질 용도가 현저히 특이하거나, 유명한 인물과 관련이 깊거나 그가 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오래 전'이라고 하는 기준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규정은 없고, 다만 국보의 경우엔 100년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판단 기준입니다.굳이 국보와 보물을 구분해보면, 국보는 유일한 것, 보물은 동일 예술품 중에서 대표성이 있는 것이라 의미를 둡니다.이의 지정을 심의하는 곳은 전문가로 구성된 문화재위원회에서 예비 대상을 검토하여 논의를 거쳐 지정한다고 합니다. 한동안 보물이었던 것이 시대가 지나고 여러가지 사료 등으로 재평가되어 국보가 되는 경우도 있고, 기존의 국보였던 것이 이후 재평가 되어 국보로서 지위가 해제되고 보물이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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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는 활 실력이 뛰어났다고 하던데 어느정도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많은 일화가 태조실록에 남아있습니다. 오녀산성 공격 때 활을 쏠 때마다 적군의 머리를 맞추었다고 하고, 왜장 아기발도의 투구를 쏘아 벗겼고 그의 의형제인 이지란이 다시 활을 쏘아 머리를 맞춰 사살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성계가 젊었을 때 아버지인 이자춘의 첩인 김씨(이후 정빈 김씨) 담에 앉은 까마귀 5마리가 우는 것이 재수없다고 없애달라고 하자 활 하나를 쏘아 5마리 모두를 잡았다는 일화도 있습니다.이것 외에도 많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 기록이 과장되었다고 할 수는 있으나 당시 태조실록에는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졌는데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가 말에서 떨어진 기록을 쓰지말라고 하였고,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이 그 내용을 그대로 쓰지 말라고 했다고 적은 것을 보면 사실일 가능성도 높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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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을 건국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단군은 실존인물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단군은 고대 한민족 국가의 황제를 지칭하는 직책과 같은 것입니다. 중국 ‘사고전서(四庫全書)’중 단군을 한국의 시조라고 언급한 자료가 있습니다. ‘사고전서’란 중국 청나라때 편찬된 책으로 진(秦)나라에서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나온 중국의 주요 서적들을 총망라한 동양 최대규모의 총서로 총 7만9000여권의 책이 수록돼 동양의 인문·사회·자연과학 연구의 밑받침이 되는 사료로 인정받고 있습니다.그리고 단군에 대한 기록은 ‘산해경광주(山海經廣注)’, ‘역대건원고(歷代建 元考)’ 등도 있다고 합니다. 너무 오랜 과거의 일이라 제대로 기록되거나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없고, 그나마 있던 사료들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이 없애고 식민사학으로 채워넣은 부분이 많아 민족사학자와 식민사학자들 간에 지금까지도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서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고조선의 건국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기원전 23~24세기 경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도 과거 위서 논란으로 시끄러웠으나 최근 그 내용이 고증되는 것들이 많아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서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는 상황입니다. 고조선 단군은 2,300여년간 유지되었다 하는데 단군세기에 나오는 47명의 단군이라는 설도 있고, 전기 47명의 단군 이후 은나라에 패했다가 다시 일어서 국가를 재건하고 40명의 단군이 더 통치했던 후기가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여러 사료들에 조금씩 단군이 언급되는 것만 보아도 우리 단군은 그리스, 로마 신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실존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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