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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 조선사회를 전기와 후기로 크게 나누는데 이렇게 나누는 의의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보통 고대 국가들의 역사를 볼 때 건국 시점부터의 패망할 때까지 흥망성쇠의 4단계로 봅니다. 조선을 전기 후기로 나누는 것이 확고한 정설은 아니고 여러가지 견해가 있는데 어떤 기준으로 전기 후기로 나누는 경우가 많은 듯 합니다. 조선을 시기별로 나누는 방법에 대한 견해를 아래에 정리해보겠습니다 한국사학계의 주류인 서울대학교에서는 관학파 집권기를 전기, 사림파 집권기를 중기, 세도정치기를 후기로 3기로 구분해서 봅니다. 시대 구분으로는 전기와 중기를 근세로, 후기는 근대 태동기로 개항 이후는 근대로 보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고려대학교에서는 서울대학교의 그러한 견해를 짜맞추기식의 궤변이라고 비판하며, 그냥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 전기-후기로 시대를 구분하고, 개항 이후 대한제국 멸망까지 근대로 편입하여 구분하고 있습니다. 현재 사학계에서는 주류인 서울대를 따라 3분법으로 파악하는 관점이 강하고 합니다. 하지만 전기 중기 후기로 넘어가는 시점의 변화가 정치세력의 교체 외에 시대를 구분할 만한 근원적인 변화가 모호하기 때문에 여전히 학계에서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현행 검정교과서에서는 조선의 시대 구분에 3시기 구분을 쓰고 있는데,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기준으로 조선 전기와 후기를, 흥성대원군의 집권을 기준으로 조선 후기와 말기를 구분 짓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서울대학교의 견해와 그에 문제를 제기하는 여러 의견들을 절충하여 사회, 문화 부분에서 관학파 및 훈구파와 사림파 집권기의 구분이 비교적 뚜렷하고, 병자호란을 대개 조선 후기로 배치하는 두 사관을 종합한 것으로 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외세의 침략에 의한 전쟁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라고 하여 각각 100년 단위로 분리하여 15세기 훈구정치기, 16세기 사화시기, 17세기 붕당정치기, 18세기 탕평시대, 19세기 세도정치기로 구분해서 이해하려는 의견도 있고, 그러한 참고서적도 나와있습니다. 다만 19세기는 고종의 즉위 시점으로 변화가 심해 그 전후를 조선전기후기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여러가지 견해들의 종합하여 조선을 3개의 시대로 구분하여 전기, 후기, 근대사회의 식으로 구분하는 것으로 한국사검정시험에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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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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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쟝르중 발라드를좋아하는데 락발라드는 다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같은 발라드 장르입니다. 발라드는 춤추다라는 라틴어인 ballare에서 파생된 프랑스어로 영어로는 Ballad라고 씁니다. 발라드는 느리고 서정적인 음악 전체를 아우르는 장르입니다. 락은 1950년대에 미국에서 발생한 대중음악으로 흑인 특유의 리듬 & 블루스와 백인의 컨트리 음악의 요소가 융합된 강한 비트의 열광적인 음악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락 음악도 강한 비트로 연주하지만 서정적인 내용 또는 조용한 분위기를 끌어가기 위한 노래의 경우 발라드처럼 조용하고 느린 전개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클라이막스에서는 일반 발라드에서의 부드러운 고음보다는 터질듯한 강렬한 고음으로 임팩트를 줍니다. 그래서 이러한 장르를 락 음악을 기반으로 하면서 발라드의 전개방식을 따른다고 하여 락발라드라고 부릅니다. 두 장르는 구분이라기 보다는 애초에 전통적인 발라드 보컬이 부르면 그냥 발라드, 원래 락 보컬이 발라드를 락 창법으로 부르면 락발라드라고 아주 명료하게 구분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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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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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역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역사는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나온 모든 시간이 역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역사들 중 가치에 따라 모두가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와 개인이 기억하는 역사가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역사에는 정도와 깊이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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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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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에서 정말로 행주를 이용해 돌을 날랐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행주치마는 여자들이 부엌일을 할 때 그릇이나 손을 닦기 위해 두른 앞치마입니다. 행주 대첩에서 여자들이 긴 치마를 짧게 잘라 허리에 두른 뒤 돌을 담아 날랐다고 하여 행주대첩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행주나 행주치마는 행주대첩 이전에도 사용했던 말이라고 합니다. 행주치마와 행주대첩을 관련지어 생각하게 된 것은 행주대첩 때 적을 무찌르기 위해 모두가 함께 적극적으로 방어한 데 대해서 극적으로 꾸며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행주라는 이름은 고려조부터 사용하고 있는 오래된 지명으로 본래 행주(杏洲)라 표기 하였으나 행주대첩 이후로 행주산성의 표기를 행주(幸州)로 하면서 일반적으로 이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행주라 부르는 것은 이곳이 살구나무가 많은 물가, 강변이기 때문에 붙여졌다는 유래설과 함께 행주산성에서 대첩을 이룬 뒤 이곳에 왕이 다녀간 뒤 임금이 행차 한 곳이라는 의미로 행주라 쓴다는 유래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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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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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정치에서 어떤 이념과 사상이 중요한 역할을 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은 성리학의 기반에서 세워진 나라입니다. 결국에 죽임을 당하였으나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고려시대 무신들의 폭정에 의한 국가 운영에 환멸을 느꼈고, 성리학을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성계는 변방의 실력자로 충분히 왕이 될 자질을 갖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선봉장은 이성계를 필두로한 무인 세력이었으나, 그 국가 통치이념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였습니다. 조선 건국 이후 원래 무인세력이었던 이씨조선이 무인들을 기반으로 정치를 펼 수 있었지만, 이후 똑같은 무인들에 의한 세력다툼이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점차 무인들의 세력을 약화시켜나갔습니다. 특히 태종 이방원의 경우 자신의 스승이자 개국공신인 정도전을 죽게 하였지만, 자신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도 형제들까지 숙청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성리학적 통치이념을 더욱 강화해나갔습니다. 이에 조선의 조정에는 성리학의 학파에 따른 사림들이 출몰하였고, 그에 따라 알력과 이해충돌이 되면서 지금처럼 당파가 나뉘게 되고 붕당정치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집단들이 왕권과 인척관계를 맺음에 따라 더더욱 권력을 강화시켜가게 됩니다. 즉 조선시대는 성리학 기반의 학연과 혼인 관계에 의한 혈연이 통치 및 권력의 주요 요소였습니다. 이에 당시 성리학의 근원지인 명에 고개를 숙이는 정치를 하였습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을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당시의 중화사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리학은 순수한 학문이라기보다 교조화되고 정파화되어 단순한 통치이념으로 각인되었기에, 조선 중기 이후부터 학문이 실제 생활과 접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가치가 제기되면서 실학이 대두되었고, 당시의 개혁사상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실학은 국가운영에 대한 중심에 설 수는 없었고, 병폐가 만연한 성리학의 동떨어진 현실감을 비판하는 정도의 운동이었지 않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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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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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이 한글 사용을 금지했었는데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연산군의 폭정에 대해 비방하는 글들이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이에 대해 격노한 연산군이 당시 방으로 널리 쓰여 백성들에게까지 자신을 비방하는 내용이 알려지자 한글로 쓰인 책을 모두 불태우라는 명과 함께 ‘언문(한글) 금지령’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한 방이 대부분 한글로 쓰여졌기 때문이었죠. 언문 금지령에는 한글을 아는 자들을 관청에 고발하고, 한글을 아는 자를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으면 그 이웃까지 처벌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고 합니다.하지만 이러한 언문금지령은 오래가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그 방을 쓴 사람을 잡아내기 위함이었는데 그 글을 쓴 사람을 찾기란 어려웠기에 어느 정도 진행되다가 방이 잠잠해지면서 자연스럽게 퇴색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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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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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조선 시대에는 복층 건물은 없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까지는 복층건물도 많았다고 합니다. 신라시대에 건축되었던 황룡사 9층 목탑(고려 고종 25년 몽골 칩입 때 화재로 소실)을 건축했던 것만 보아도 고층으로 목조건물을 지을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까지는 입식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한옥도 복층의 건물도 있었습니다. 온돌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지만, 조선시대 경신대기근이라는 재난 이후로 본격적으로 온돌이 보급되었습니다. 대부분 목조건물을 토대로 한 것이 대부부이었기에 온돌은 1층에 자리하게 되었고, 지금의 보일러 시스템 기술수준이 아니었기에 2층가지 온돌을 놓기는 어려워 단층 위주였고, 복층이 있더라도 1층은 생활공간 2층, 3층은 서고 또는 창고 형태로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기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죠. 궁궐에도 경회루의 경우 지금의 필로티 방식으로 1층은 기둥으로만 되었고 2층이 연회를 할 수 있는 자리로 되어있었던 것을 보면 고층을 지을 수 있는 기술은 있었다고 보입니다. 온돌의 사용과 그 생활의 고착화로 점차적으로 복층의 한옥 등은 사라지게 되었다 추측됩니다. 서민들의 초가집은 구조상 복층 자체가 어려웠을 것입니다.그리고 고려시대까지는 황제국가이었고, 조선시대는 성리학자들의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로 명나라를 대국으로 인정하는 외교를 펼쳤기에 궁궐도 명나라보다 크고 화려하게 짓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이에 민가들도 궁궐보다는 낮고, 작게 지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것은 복층의 한옥이 조선말기~일제강점기에도 남아있었기에 그 이유는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궁궐은 상징적인 건물이니 그랬다 해도 민가는 복층 건물이 존재했으니까요. 현재는 보일러 기술이 발달하여 최근에 지은 한옥촌의 한옥들은 2층 이상으로 지어지는 곳도 많이 보입니다. 한옥의 기술과 우리나라 온돌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더 높고 멋진 한옥들이 많이 지어졌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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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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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뜻하는 사자성어들은 어떻게 생겨낫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먼저 관포지교 管鮑之交는 관중과 포숙의 사귐. 즉 영원히 변치 않는 참된 우정을 뜻합니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관중과 포숙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폭정에 의해 혼란이 계속되자 관중은 노나라로 포숙은 거나라로 망명하였습니다. 그러다 제나라의 폭군 양공이 살해되고 혼란이 계속되어 군주자리가 비게 되자 공자 규와 그의 동생 소백이 서둘러 귀국길에 올라 형제가 권력 쟁탈전을 벌이게 됩니다. 그 사이에 관중은 규와 함께 하고, 포숙은 소백과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소백이 이기게 되고 잡힌 관중이 사형에 처해 지게 되는 순간 포숙이 나서서 천하의 패자가 되기 위해서는 관중을 등용하라고 하여 죽이지 않고 등용하게 됩니다. 이에 관중은 사람들에게 어린시절부터 이어온 그의 됨됨이를 칭송하며 자신을 낳아준 사람은 부모님이지만 자신을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라며 서로를 존중하고 변치않는 우정을 증명한 일화에서 나온 말입니다. 죽마고우 竹馬故友는 중국에서 대나무로 만든 말을 타고 놀았던 옛 친구를 가리키는 표현 가운데 가장 자주 쓰이는 말입니다.진나라 때 촉 땅을 평정하고 돌아온 환온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12대 황제 간문제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은호를 건무장군 양주지사에 임명하였습니다. 그는 환온과 어릴 때 친구였는데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정적이 되었습니다. 왕희지(王羲之)가 화해(和解)시키려고 했으나 은호(殷浩)가 듣지 않았다. 오호십육국 중 하나와 중원의 땅을 놓고 전쟁에 은호가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으나 도중에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결국 패배하였습니다. 이에 환온은 은호에게 책임을 묻는 상소를 올렸고 이에 변방으로 귀양가게 됩니다. 그리고 환온은 사람들에게 "은호(殷浩)는 나와 어릴 때 같이 죽마(竹馬)를 타고 놀던 친구였지만 내가 죽마를 버리면 은호가 늘 가져가곤 했다. 그러니 그가 내 밑에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하며 비난하고 무시하여 은호는 귀양지에서 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래서 죽마를 타고 놀았던 옛날 친구라는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 유래는 좋은 친구의 뜻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지란지교 芝蘭之交는 지초(芝草)와 난초(蘭草) 같은 향기(香氣)로운 사귐이라는 뜻으로, 벗 사이의 고상한 교제를 이르는 말입니다. 이것은 명심보감의 교우편에 나오는 말로 공자가 말하기를 "착한 사람과 같이 살면 향기로운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안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오래도록 그 냄새를 알지 못하나 곧 더불어 그 향기가 동화된다"라는 구절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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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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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에는 샤워를 안해 몸에서 악취가 났다는게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세시대에는 위생 관념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습니다. 하수도 시설이 되어있지 않아 용변통에 똥오줌을 모아두었다가 길에 버리거나 강에 버리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중세의 기사들의 경우 갑옷을 입고 전쟁을 하다가 벗고 용변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입은 채로 볼일을 보고, 전쟁이 끝난 후 돌아와서 땀, 소변, 대변 등등이 범벅이 되어있는 갑옷을 소변, 모래, 식초를 섞은 것을 비누대용으로 하인에게 갑옷을 닦도록 했다고 합니다. 전혀 안씻지는 않았으나 정말 평생 씻지 않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잘 씻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4세기 유럽 전역을 휩쓸고 간 흑사병과 각종 전염병의 원인이 물이라고 하여, 물에 대한 공포감이 만연했습니다. 인간의 피부는 물을 막아주지 못하고 쉽게 통과시킨다고 중세인들은 믿고, 물로 씻으면 모공이 열려 그 곳을 통해 나쁜 것들이 몸으로 침투하여 병을 일으킨다고 믿었습니다. 왕족들도 마찬가지였는데 프랑스 루이 14세의 경우 평생 2번만 씻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그의 입냄새는 최고였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의 경우 결혼식과 출산일 2번만 씻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중세의 귀족들은 천을 가지고 다니며, 땀이랑 오물을 닦았고, 씻는 것 대신 옷을 자주 갈아입는 것으로 더러움을 감추었고, 이에 몸에서 나는 악취를 감추기 위해 향수가 발명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15세기 의학 논문에는 목욕이 몸을 따뜻하게는 하지만 약화시키고, 모공을 확장시키므로 질병이 생긱기 쉽고 사망할 수도 있ㄷ가고 경고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에 따라 공중 목욕탕도 법령에 의해 폐쇄되었고, 17~18세기에는 목욕을 전혀 안하는 문화가 정착되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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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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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은 귀가 안 들리는데도 어떻게 작곡을 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나중에 청력이 떨어졌으나, 그 때까지 음악을 해오면서 그 음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절대음감이었기에 귀로 듣지 않아도 어떻게 연주되고 어떤 느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능력은 아니지만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그 음이 어떤 음인지를 알 수 없었다면 작곡이 불가능했겠지만, 오랜 기간 동안 경험하였던 것이기 때문에 청력을 잃은 것이 불편했을 수는 있지만 작곡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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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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