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은 옮길수 있을지언정 이미 내린 결정은 고칠수없다는 말로서 한번 결심한 일은 절대로 굽히지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사자성어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南山可移(남산가이)입니다. 南: 남녘 남 山: 매 산 可: 옳을 가/들을 가/가히 가/쯤 가(정도)의 뜻으로 '呵(가)' '訶(가)의 원자에서 파생하여, 좋다, 가능(可能)의 뜻임移: 옮길 이 당나라(唐)의 정사(正史)로 이십사사(二十四史) 가운데 하나인 구당서(舊唐書)의 이원굉전(李元紘傳)에 민사소송을 담당하는 벼슬아치인 이원굉은 사람됨이 정직하고 안건 처리에 대단히 공정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승려가 어떤 사람이 절간의 석마(石馬)를 빼앗아 갔다고 하면서 탄원하였는데 그 범인은 태평공주라는 조정의 권세를 등에 업은 세력가였습니다. 하지만 이원굉은 조공정하게 판결하여 석마를 돌려주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이에 이원굉의 상관인 두회정이 태평공주가 두려우니 원래 판결을 고치라고 권고하였는데 이에 그는 판결문에 '남산은 옮길 수 있어도 판결은 흔들릴 수 없다.'라는 뜻의 南山可移 判不可搖(남산가이 판불가요)라는 여덟 자만을 썼다고 합니다. 이후로 남산은 장안성 남쪽의 큰 산인데 이원굉의 뜻은 원래 판결을 움직인다는 것은 남산을 움직이기보다 어렵다는 의미로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결정에 대해 비유해서 표현할 때 남산가이(南山可移)라고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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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합스부르크왕가는 근친결혼을 고집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합스부르크가는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가 되기 위해 문서까지 위조해서 귀족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가문의 위대함을 증명하고자 오스트리아 지역의 빈을 문화의 도시로 육성시켰고, 슈테판대성당과 빈대학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많은 음악가들의 활동무대가 됩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다른 가문들과 결혼정책을 펼쳤고, 심지어는 황제의 외동딸인 엘리자베트와 결혼하여 130년만에 황제가문으로 상승했고, 영토도 가지게 됩니다.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1세는 부르타뉴 가문의 안과 결혼했고,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와 자신의 딸 마르게리따를 결혼시킵니다. 그러나 부르타뉴 영토를 차지한 막시밀리안 1세에게 불만을 가진 샤를 8세가 자신의 결혼을 무효화 시키고 무력으로 부르타뉴를 다시 차지하고 자신의 장모 겪이었던 안과 결혼하면서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은 숙적이 됩니다.이에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합스부르크가는 스페인 왕가와 사돈을 맺었으나 스페인의 상속자들이 모두 사망하고 결국 합스부르크가의 수장인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 국왕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헝가리 왕가와도 사돈을 맺었는데 헝가리 왕이 전쟁에서 전사하자 헝가리 지역도 차지하게 됩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반합스부르크의 성향이 강했기에 합스부르크가에서 차지하고 있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그 사이는 프랑스임)를 다스리기에 어려움을 느꼈고, 카톨릭인 스페인은 이교도와 개신교와의 결혼은 금지하고 있었기에 영토를 지키기 위해 혈통이 중요하다는 의식이 박히면서 궁극적으로 근친혼을 선택하게 됩니다. 근친혼에 의해 태어난 자식 중 돈카를로스는 지금에 와서 말하는 취약X증후군이라는 유전적 질환을 가졌는데 주걱턱, 짝다리, 정신질환을 자겼었고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됩니다. 이후 필리페 4세 국왕은 여동생의 딸과 결혼하는 등 근친혼을 이어갔고, 그의 딸 마르가리따는 외삼촌인 레오폴트 1세와 정혼합니다. 그녀도 자랄수록 주걱턱이 심해지고 21세에 사망하게 되었고, 그의 남동생 카를로스 2세도 38세에 사망하였습니다. 후대에 조사해보니 근친혼일 시 나타나는 유전병에 의해서 스페인 왕실의 자녀 34명 중 50%가 10살 이전에 사망하였으며, 근친혼에 의해 유전병으로 주걱턱 등이 나타날 확률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10여년간 이어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끝에 결국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스페인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합스부르크가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정략결혼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인 로드링겐 가문의 공작 프란츠 1세와 결혼하면서 근친혼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슬라브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한 이유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마지막 황제인 카를 1세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국외로 추방당하게 되면서 전쟁에서 패한 합스부르크 제국은 마침내 종지부를 찢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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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이 대항해시대를 가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선 종교적 이유와 경제적 이유가 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이베리아 반도는 오랜 기간 가톨릭 세력과 이슬람 세력이 대립해왔는데, 이베리아 가톨릭 세력의 이슬람 축출 이후 이베리아는 가톨릭의 영향력이 강해졌지만 이베리아의 왕조들은 이슬람 세력을 경계했고, 동방에 있다는 전설 속의 가톨릭 왕 프레스터 존을 찾아 동맹이 되는 것을 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중해를 통해 동쪽으로 가는 것은 오스만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기에 대서양을 통해 반대편으로 간다면 프레스터 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경제적으로는 페스트로 인한 인구 급감하였고 봉건제를 빠르게 붕괴시켰습니다. 노동력 감소로 소작농의 임금이 치솟았고 소작농을 못구한 영세 영주들이 파산하였습니다. 이에 시장과 화폐 경제, 교역의 시대가 도래하였고, 전체적인 국가 경제 팽창이 필요하게 되어 대항해 시대의 실마리가 되었다 볼 수 있습니다. 교역에서의 향신료의 확보 문제도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기술적으로는 이슬람과의 교류를 통해서 나침반, 아스트롤라베, 사분 같은 측정기술로 원양항해술이 발달하게 되었고, 해도제작능력이 발달하였습니다. 이러한 항해술을 기반으로 운영될 선박들의 건조기술 등이 발달하여 안정적으로 원양 항해를 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춰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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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어떤 이유로 몰락한건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유럽을 정복한 나폴레옹이 무리하게 러시아 정복 원정을 나갔다가 실패하여 군대를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군대를 재정비할 시간도 없이 새로이 급조된 미숙한 군대를 이끌고 나폴레옹은 연합군과 라이프치히에서 사활을 건 최후의 일전을 벌였습니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20만명이 넘는 러시아 · 프로이센 · 스웨덴의 연합군이 나폴레옹이 이끄는 라인 동맹과 프랑스군을 격퇴하고, 프랑스로 진격하였으나 승리를 눈앞에 두자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가 유럽을 지배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결국, 1814년 3월 9일에 러시아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영국 4개국이 쇼몽 조약을 체결하여 4국 동맹 체제가 형성되게 됩니다.4국 동맹군은 곧 파리에 입성하고, 나폴레옹은 퇴위하고 부르봉 왕가의 정부가 복귀하여 4국 동맹과 파리 강화 조약을 맺습니다. 프랑스가 점령하였던 모든 외국의 영토가 반환되었고, 프랑스의 국경선은 1792년의 상태로 되돌려졌으며 나폴레옹은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내세워 유럽을 정복하고 황제가 되었던 나폴레옹은 자신이 이용한 혁명의 정신을 깨달은 유럽의 민족주의에 의해 몰락하고 말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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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고려 시절 수많은 가병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는 건국 당시 지방 호족 세력들의 힘을 빌어 활용키 위해 태조의 정비(正妃) 6명과 기타 부인 23명 등 29명은 모두 태조가 지방의 호족, 공신·귀화 귀족 등과 유대를 맺기 위한 혼인 정책에 따라 취한 그들의 딸들로 이 가운데 경주의 평준, 합주의 이원, 춘주의 왕유, 서경의 김행파, 신주의 강기주 등 유력한 호족들이 그들의 딸을 태조에게 바쳐 세력보전을 꾀하였습니다. 태조는 또한 지방 호족을 회유하여 그들에게 중앙관직의 위계와 똑같은 명칭의 향직위를 주고, 중앙 정부를 축소한 듯한 조직을 갖게 하여 지방 자치를 맡게 하는 한편, 기인이라 하여 호족의 자제를 인질로 삼아 그 세력을 견제하였습니다. 여기서 지역 호족 세력에 지방자치를 맡겼으니 공권력 수행 및 치안, 경호를 위해 사노, 사병 등이 발달되었고, 무신정권 시대에 들어 시작되어 고려말기까지 경대승, 최충헌의 도방, 최우의 서방, 최씨가문의 마별초, 이성계의 가별초 등 이름있는 가문들은 가병들을 공식적으로 가질 수 있었습니다. 고려시대는 중앙집권 성향이 적었고, 지방분권 성향이 컸던 탓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성계는 동북면에서 국경의 여진 등의 공격을 방어하며 관리해야 했기에 더 강하고 많은 가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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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고려시대에 정말 요동성을 점령한 적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래 요동지역은 고조선의 영역이었다가 연나라의 공격으로 잃게 되었다가 한나라 때 고구려 미천왕이 그 지역 한사군을 몰아내고 광개토대왕이 요동을 점령하고 고구려 영토로 수복된 후 요양 지역에 요동성을 쌓았습니다. 고구려 멸망 후 당이 지배하다가 대진국 발해가 건국되며 다시 찾아와 200년간 영토였다가 발해가 멸망하며 요, 금, 원나라에 속했었습니다.그러다 원·명 교체기에 명나라는 요동도지휘사사를 두어 요동을 포함한 만주 경략을 꾀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고려와 여러 가지 트러블이 생겼고 고려는 공민왕 5년에 철령을 넘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고, 이후 관서 지방과 관북 지방 북쪽으로 영토를 넓혔습니다.공민왕 18년 고려는 이인임을 총지휘관으로 하여 원나라의 동녕부를 치게 하였는데 동북면 원수 이성계는 1370년 음력 1월 압록강과 파저강을 건너 이오로티무르가 지키는 우라산성을 포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서북면 원수 지용수와 합세하여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을 공격하여 요동성을 빼앗았습니다. 하지만 고려의 장기적인 점령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부근 주민들에게 고려에 귀순할 것을 권고하고 회군하였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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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궁녀 선발 조건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 초기에는 관청에 딸린 노비 가운데 조상과 친인척 중 죄인과 병력이 없는 집안의 아이를 선출했다고 하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중인 계급이나 낮은 벼슬아치들의 자녀 중에서 궁녀를 뽑았다고 합니다. 궁녀를 희망하는 소녀 중 10세 이상(어리게는 4세부터 궁에서 궁녀수업을 받는 이도 있었다 함)은 앵무새 피로 처녀성을 판단해 최종적으로 선발했다고 전해집니다. 궁녀의 조건을 나열해보면, 훗날 왕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부모나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궁녀가 될 수 없었다고 합니다. 1. 조상 중에 죄인이 없어야 한다. 2. 식구 중 중병을 앓았다거나 장애를 가진 이가 없어야 한다.3. 용모가 뛰어나야 하고 품성이 좋아야 한다4. 처녀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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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이 압록강 이북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것은 언제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대국가 시절에는 대부분 삼한의 한민족이 그 일대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전쟁으로 인해 쟁탈전은 있었어도 실질적으로 고구려 멸망 후 당에서 안동도호부를 세워 자신들이 한반도를 관리하려는 야욕을 부리던 시기를 제외하면, 항상 우리 한민족의 국토였습니다. 최종적으로 대진국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는 요, 원, 명, 청으로 지나오면서 요동 지역에 대한 영향력은 완전히 소실한 것으로 판단되고, 간도 즉, 만주 지역의 경우 청과 분쟁은 있었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의 영토로서 관리되었다고 여러 사료에서 확인되어집니다. 1712년 숙종 38년에 백두산정계비를 조선에서 세우면서, 비문에 서쪽으로 압록강, 동쪽으로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에 조선에서는 송화강 상류가 토문강이므로 간도까지 조선의 영토로 확정하고 관리까지 파견하여 다스립니다. 청나라는 토문강이 두만강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조선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후 일본이 을사조약을 근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하고 청과 간도 지역에 대해 교섭을 벌여오다가 남만주철도부설권과 푸순 탄광채굴권을 얻는 조건으로 간도를 청에 넘겨주는 협약을 1909년 9월에 일본 마음대로 체결하였습니다. 이 이후부터 우리 한민족은 이 일대의 영향력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에도 우리는 그 지역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돌려받아야 하는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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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 전쟁 시작의 이유와 전개 그리고 결과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라 김춘추와 당 태종이 만나 나당 동맹을 결성할 때 고구려와 백제 멸망 후 대동강을 기준으로 북쪽은 당이 차지하고 남쪽은 신라가 차지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고구려와 백제가 무너지고 나니 당은 고구려의 옛 영토에는 안동도호부를, 백제의 옛 영토에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직접적으로 한반도를 다스리려는 욕심을 드러냈습니다. 늘 자신들을 짓누르던 패배의식과 불안감의 원인인 한반도가 완전한 자기네 땅이어야 안심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합니다.원래도 당의 목적은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고 나면 상대적으로 약한 신라를 나중에 다 집어삼켜서 한반도 전체를 당의 손아귀에 넣는 것을 목표로 했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하지만 신라는 철저한 전쟁 준비와 고구려부흥세력을 포섭하는 등 하여 웅진도독부를 쳐내고 백제의 옛 땅을 회복하였습니다. 신라도 당과 손절할 시기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은 한반도에 대한 야욕이 있었으나, 토번국도 견제해야 해서 계속해서 나당전쟁을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반도를 집어삼키겠다는 야욕은 버리지 못해 패퇴하여 요동으로 옮긴 웅진도독부 건안성에 백제유민을 옮기고, 백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대방군왕에 봉하여 이른바 소백제국의 세우고 한반도의 신라를 견제하고, 고구려유민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멸망한 고구려의 옛 땅과 그보다 더 넒은 영토를 차지한 대진국 발해의 등장으로 당은 더이상의 한반도에 대한 욕심을 부릴 수 없게 됩니다.지금도 그렇지만, 한반도는 산지형으로 되어있어 외세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요충지이고, 삼면이 바다로 되어있어 무역과 교역에 탁월한 입지이며, 비옥한 토지로 곡창지대가 많아 식량조달에 좋은 전초기지가 될 수 있으니 당에서 욕심을 내는 것은 당연하였지 않나 추측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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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임금의 나이가 어린상태에서 즉위했다면, 나랏일은 어떻게 보살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수렴청정이라고 하여 왕의 뒷자리에 왕의 어머니, 또는 할머니가 모습을 보이지 않게 발을 드리우고 도움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왕가의 여자 어른인 대비 또는 대왕대비가 했던 것이었죠. 발을 드리워 얼굴을 보이지 않은 이유는 당시는 여자가 나서서 정치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우 보통 왕이 성인이 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단종의 경우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는데 수렴청정을 할 어머니나 할머니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인 문종이 죽기 전에 고위 신하들에게 단종의 보필을 부탁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도 나이 어린 왕이 즉위하면 어김 없이 왕권과 권력의 찬탈을 위한 시끄러운 일들이 많이 생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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