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프로필
프로필
답변
잉크
답변 내역
전체
학문
역사상 얼음을 최초로 생산하여 사용했던 국가는 어디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748년 영국의 과학자 윌리엄 컬런이 땀이 마르면서 피부의 열을 빼앗아 가는 기화 원리를 응용해 인류 최초의 얼음을 발명하게 됩니다.
학문 /
역사
23.07.16
0
0
조선시대에는 전체 인구조사를 어떤방식으로 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오가작통법은 조선시대 다섯집을 1통으로 묶은 호적의 보조조직입니다.조선 최초의 오가작통법은 단종 연간에 시행되었던 것으로 추정, 1485년 한명회의 발의에 따라 채택되어 경국대전에 올랐는데 이에 의하면 한성부에서는 방 밑에 5가작통의 조직을 두어 다섯집을 1통으로 하여 통주를 두고 방에 관령을 두었습니다.
학문 /
역사
23.07.16
0
0
임꺽정의 원수라는 이흠례는 어떤 인물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흠례는 11세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진천 송씨 슬하에서 형 3명, 동생 1명과 함께 자랐으며 이흠례부터는 좁은 의미에서 왕의 가까운 친족으로서 대우도 받고 통제도 받는 왕족이 아니었는데, 이때문에 오히려 그는 명예직이 아닌 실직에 나설수있었는데 왕족은 벼슬을 할수없었기 때문입니다. 1549년 무과에 급제, 이후 선전관과 전라도 판관을 역임, 나주 판관으로 있던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쳐들어온 왜구들을 물리치는 공을 세우고 방어사를 지냈습니다.이후 황해도 신계 현령으로 부임, 재직중이던 1557년 오연석 등 도적들이 황해도 일대를 휩쓸며 약탈과 살인을 일삼자 주민들과 협조해 이들을 처단했습니다.그런데 이때 토벌한 도적은 황해도와 경기도, 한성 일대까지 엄청난 세를 불리며 활약한 임꺽정이 두목이었던 조직이었고 조정에서는 이들을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국적, 반란군으로 규정할 정도로 사태의 심각성을 느껴 1560년 명종은 일전에 도적들을 토벌한 경험이 있는 이흠례를 황해도 봉산 군수로 임명, 임꺽정 무리들을 소탕하도록했습니다.이흠례는 용감히 싸웠고, 임꺽정의 부하들을 많이 사로잡았으나 임꺽정은 이흠례가 신계현령으로 있을 떄 자신들에게 피해를 많이 입힌 일을 생각해 후환을 없애기 위해 이흠례를 죽일 계획을 세우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임꺽정의 부하 서림이 이를 관에 밀고하여 계획은 실패, 관군이 앞잡이가 된 서림에 의해 임꺽정 패는 대부분 체포, 임꺽정은 쫖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저때 살해당할 뻔 한 이흠례는 선전관 정수익, 평산 부사 장효범 등과 함께 임꺽정 일파를 추격, 그들의 함정에 걸려 실패하자 사헌부에서는 이흠례를 비롯한 토벌군에 참여한 관료들을 처벌하라고 명종에게 간했으나 명종은 이흠례가 그동안 세운 공이 있다며 윤허하지 않았습니다몇달 뒤 품계가 높아져 통정대부가 되었으나 사헌부에서 도적 토벌에 실패한 전적을 문제 삼아 이흠례의 품계를 내리라고 명종에게 요청하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학문 /
역사
23.07.16
0
0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1966년에 출간된 '수학의 정석' 입니다.
학문 /
역사
23.07.16
0
0
암행어사는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으며, 관직품계는 어느정도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암행어사는 조선시대 왕명을 받고 비밀리에 지방을 순행하면서 악정을 규명하고 민정을 살핀 임시 관직으로 수의 또는 직지 라 합니다.암행어사라는 용어가 처음 보이는 것은 중종 4년인 1509년으로 이때부터 본격적인 암행어사 제도가 시행된 것으로 봅니다.
학문 /
역사
23.07.16
0
0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심했던 산사태 사고는 어떤 사고 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20년 통틀어 피해가 가장 잦았던 곳은 경남으로 7회였으며, 20년동안 피해 면적을 따져봤을 때 가장 넓은 곳은 강원, 경남, 경북,전북 등 순이었습니다.
학문 /
역사
23.07.16
0
0
과거 스페인의 함대에 무적함대라는 닉네임이 붙게된 연유는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 함대의 정식 명칭은 위대하며 가장 축복받은 함대로 무적함대라는 것은 일종의 별칭이었습니다.정식 명칭 자체가 원래 스페인 해군을 부르던 말이 아니라 1588년 칼레 해전에서 잉글랜드와 교전하라고 편성한 해군 함대에 새로 붙인 이름입니다.애초에 무적함대라는 이름은 칼레 해전 이후 잉글랜드가 조롱조로 부각시킨 이름이나 단순히 조롱만 하기 위한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정치적인 노림수가 있었는데 당시 잉글랜드와 스페인 간의 전쟁은 개신교와 가톨릭 간의 종교 전쟁의 성격을띠었는데 인간이 만든 무적함대를 신이 보내신 바람에 의해 물리쳤다는 식으로 선전하는 것은 우리쪽 신앙이 진짜라는 정통성을 확보하기에 좋은 수단이었습니다.
학문 /
역사
23.07.16
0
0
우리나라 최초의 사랑노래 <황조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 제 2대 유리왕이 지은 가요로,BC 17년 에 된 노래로서 삼국사기에 실려 전하는 유래와 한역가는 다음과 같습니다.유리왕은 왕비 송씨가 죽자 화희와 치희 두 여인을 계실로 맞았는데 이들은 늘 서로 쟁총하던 끝에 왕이 기산에 사냥을 가 궁궐을 비운 틈에 화희가 치희를 모욕하여 한나라로 쫓아 버렸고 왕이 사냥에서 돌아와 이 말을 듣고 곧 말을 달려 뒤를 쫓았으나 화가 난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왕이 탄식하며 나무 밑에서 쉬는데 짝을 지어 날아가는 황조를 보고 감탄하여 이 노래를 지었습니다.황조가는 단순한 사랑 노래가 아니라 그 이면에는 고구려 건국 초기의 정치적 세력 다툼의 상황이 깔려있으며 치희와 화희의 다툼은 결국 외래세력과 토착세력의 권력 다툼이며 황조가는 왕권을 강화시키려다 좌절한 유리왕의 심정을 보여주는 서정시 입니다.
학문 /
음악
23.07.16
0
0
'감저'라는 말이 고구마를 의미하던데 그 역사적 어원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감저는 고구마가루를 찹쌀가루와 섞어 시루에 찌는 떡으로 고구마가 우리나라에 도입될 당시 남방 즉 지금의 일본에서 들어왔다고하여 남방감저라고 하였으며 병은 떡을 의미하는 한자어 입니다.규합총서에 따르면 고구마를 껍질째 씻어 말리어 가루로 만들어 칠가루에 섞어 떡을 하면 달기가 꿀 섞은 것보다 더하다. 감자가 마른 후 바람을 쏘이면 달콤한 맛이 아니니 왼이로 말려 임시하여 가루로 만들어라 고 남방감저병의 맛과 조리법을 설명하고있습니다.
학문 /
역사
23.07.16
0
0
조선시대 동성동본은 결혼을 할 수 없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이 건국 된 후 조선은 동성혼을 엄금한 대명률을 준용하여 같은 성씨간의 혼인을 법으로 금했습니다. 그러나 성씨의 종류가 많지 않은 대신 본관이 세분화된 조선의 현실에서 중국과는 다르게 동성금혼이 아닌 동성동본금혼이 관행으로 자리잡았습니다.17세기 이후 이 같은 동성이본혼까지 규제하려는 시도가 나타나 속대전, 대전회통 등의 법전에서 본관이 다르더라도 성씨가 같으면 혼인할수 없다고 규정하게 되나 당시 호적대장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동성이본 간에는 혼인이 빈번하게 나타나 규범과 관행에 차이가 있었으며 동성금혼이 아닌 동성동본금혼 관념이 정착되었습니다.일제강점기에 들어 1912년 제정된 조선민사령에서는 친족상속에 관한 사항은 관습에 의거한다고 하여 관습주의를 표방했는데 조선 관습에 대해 대대적으로 조사해 간행한 관습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동성동본금혼을 관습으로 규정, 1923년 개정 민사령에는 혼인신고를 해야 효력이 발생하는 법률혼제도를 도입했는데 이때 혈족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서류가 요구되어 동성동본금혼의 관습은 더 강화되었습니다.성씨에 따라서는 동성동본이라 하더라도 시조가 다른 경우 통혼하는 관행도 많았는데 혈족이 다르다는 것을 재판소에 신청해 입증해야 했으므로 어려운일이 되었고 반대로 동성동본이 아님에도 혼인하지 않던 관습은 인정되지 않아 결혼에 문제가 되지 않는 한 금혼과 허혼의 범위가 동성동본이라는 하나의 원칙으로 통일 됩니다.
학문 /
역사
23.07.15
0
0
928
929
930
931
932
933
934
935
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