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시조의 사설시조는 일반 평시조와 어떻게 다른가요?
사설시조는 평시조의 형식에서 두 구 이상이 틀에서 벗어나 글자수가 10자 이상 늘어난 시조입니다. 일반적으로 초장, 종장이 짧고 중장이 매우 길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선 후기 문학 창작층의 변화와 평민계층의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의 발전으로 사설시조가 널리 지어졌습니다. 중인을 비롯하여 시조작가, 부녀자, 기생, 상인, 몰락양반 등이 사설시조를 창작하였으며 자유로운 감정의 표현과 사회적 비판의식, 민요, 가사, 대화 등이 섞여 나타나기도 합니다. 사설시조는 인간 생활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담아내는 문학갈래입니다.
Q. 세계적인 문호인 러시아의 톨스토이가 남긴 명언과 작품 속에서 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톨스토이는 그의 두가지 장편인, 전쟁과 평화 및 안나 카레리나 등으로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위대한 작가로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리나와 같은 작품에서 톨스토이는 윤리적인 삶의 기준이 특정한 대상 또는 상황에서는 변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톨스토이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존재의 허무함, 보잘것없음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러시아정교회와는 다른 그리스도교 사상들을 담은 책을 내며 자신만의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깨달음을 알리려 합니다. 또한 귀족 신분이었던 그는 러시아의 고질적 병폐인 농노제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농민들의 삶의 개혁을 위해 자신의 고향에서 농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학교를 만들고, 교과서까지 직접 편찬하는 등의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이러한 노력은 같은 귀족들에게도, 그리고 농민들에게도 심지어 가족들에게 지지 받지 못합니다. 귀족이지만 농민들과 같이 현실에 맞서며 살아가겠다는 신념으로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막내딸과 함께 여행을 떠난 뒤 기차역에서 폐렴으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Q. 속담의 기원에 관한 질문입니다. 알려주세요
관용적 표현은 둘 이상의 낱말이 결합하여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는 관습적인 표현을 말합니다. 이러한 관용적 표현은 속담과 관용어 두 범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속담은 관용어보다 상징성, 관습성, 대중성, 일상성을 바탕으로 오랜 세월에 거쳐 정착된 표현으로 삶의 지혜를 전달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속담은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몹시 놀란 사람이 그와 비슷한 것만 보아도 겁을 낸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라를 보기만 해서 놀랐다기보다 자라의 무는 힘이 매우 강한데 자라에게 물린 사람이 그 고통때문에 무쇠로 만든 솥뚜껑을 보고도 놀란다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Q. 시조에는 연과 행의 구분이 있을까요?
평시조는 초장, 중장, 종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45자 내외로 쓰입니다. 현대시처럼 연과 행의 구분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시조의 갈래는 평시조, 연시조, 엇시조, 사설시조 등의 있는데 조선 후기에 초, 중, 종장 중 한 장 또는 두 장의 길이가 늘어나는 경우 엇시조, 사설시조라고 이야기합니다. 현대시처럼 평시조 하나가 하나의 연처럼 사용되어 연결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연시조라고 합니다. 평시조의 형식적 한계로 인해 많은 내용을 담지 못할 때 여러 평시조를 이어서 하나의 주제로 창작한 시조입니다. 최초의 연시조는 조선 세종대 맹사성의 '강호사시가'이고 윤선도 '어부사시사'가 연시조 중 유명한 작품입니다.
Q. 내방가사는 왜 한글을 사용하게 되었나요?
내방가사는 조선시대 양반 집안의 부텨자들 사이에 유행한 가사를 말합니다. 규방가사, 규중가도라고도 하는데 조선 후기 부녀자에 의하여 지어져서 전해진 가사를 모두 지칭하는 말로 조선의 여성문학의 대표적 갈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전기, 중기에는 사대부 계층의 일부 학자층에서 가사문학이 주로 창작되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영조, 정조 이후 부터는 일반 평민이나 부텨자들 사이에서도 활발한 창작활동이 일어났습니다. 내방가사가 주로 한글로 창작된 이유는 당시 정통적 문자교육이던 한문을 여성들이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대부 계층의 학자, 문인들이 쓰지 않던 한글은 한문보다 훨씬 배우기가 쉬워 중인, 평민, 여성들도 쉽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게 여성들도 한글을 이용한 문학작품 창작활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형식이 비교적 자유로운 가사문학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Q. 조선시대 임진왜란 전과 후의 시가문학은 어떤변화를 가지고 있나요?
임진왜란 전 조선 전, 중기의 문학은 사대부계층이 주도하여 조선왕조의 정당성을 나타내거나(악장), 정해진 틀 안에 유교적이념이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시조, 시조로 표현할 수 없던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 선비로서 자연에 은거한 삶 등을 그린 가사 등이 발전하였습니다. 지배계층인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받아들여 유교적 이상을 나라의 체제, 백성들의 삶에 적용하고자 했기 때문에 교훈적인 내용이나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낸 작품들이 많았다. 그런데 임진왜란은 조선 왕조에 대한 신뢰, 지배계층의 권위 등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사건이었기 때문에 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먼저 창작층이 넓어지게 되어 많은 계층들이 문학을 통해 자신들의 생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녀, 중인, 평민에 이르기까지 문학을 향유하며 창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변화로 인해 틀에 맞춰야 하는 정형시인 평시조보다는 사설시조가 유행하게 되고 평민들이 창작하는 가사작품들이 많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후기 한글소설의 발전으로 인해 여성주인공을 내세운 소설, 지배계층을 비판하는 소설 등이 창작되면 당시 백성들의 변화된 생각이 문학으로 표출되게 되었습니다.